#노동계 “인권침해 온상 폐지를”
직장 옮기는 횟수ㆍ조건 엄격 제한
사업주 횡포에 근로자 잇단 자살
출국 후 퇴직금 지급도 차별 지적
#고용부 “불법체류 감소 등 성과”
기본권 침해 땐 직장 이동 가능
근로자 송출비용 하락 등 효과
“국제노동기구도 긍정적 평가”
“다른 회사로 옮기려면 돈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 한국으로 데려올 때 200만원이 들었으니 그 돈을 안 물어주면 (사업장 이탈했다며) 불법체류로 신고하겠다면서…”
추석 명절을 앞둔 지난달 31일, 스리랑카에서 온 외국인 근로자 미라이(30ㆍ가명)씨는 올해 초 회사를 옮기려다가 사업주의 협박에 시달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라이씨는 경기 김포의 섬유회사에서 2년 동안 일하다가 궂은 일과 스트레스 탓에 건강이 악화됐다. 치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자 그는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하지만 사업주는 구인비용을 물어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고, 미라이씨가 주변에서 겨우 200만원을 빌려서 지급한 뒤에야 선심 쓰듯 작업장 변경을 허용했다. 미라이씨는 “회사를 옮기겠다고 하면 ‘사업장 이탈신고를 하겠다’고 해서 나처럼 수백 만원을 물어 준 동료가 한 두 명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우리나라 헌법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고용허가제’로 국내에 들어와있는 약 27만명의 외국인 근로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사업장 변경이 허용되지 않아 매년 자살하는 사례가 잇따르지만, 정부는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정부가 선도적 이주관리 시스템이라며 자찬하는 13년 된 고용허가제의 이면이다.
노동3권은 보장한다지만, 곳곳에 독소 품은 제도
고용허가제는 단순노무인력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기업이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일정한 절차를 거쳐 허가하는 제도이다. 1993년부터 시행된 외국인 산업연수생제도는 근로자로서의 권리가 인정되지 않아 노동착취 수단으로 변질됐고, 2004년 8월부터 외국인에게도 노동3권(단결권ㆍ단체교섭권ㆍ단체행동권)을 보장하는 고용허가제가 도입됐다.
그러나 여전히 노동계에선 고용허가제를 ‘반인권적 노예계약’이라고 비판한다. 노동계가 대표적 독소조항으로 꼽는 건 사업장 변경 제한이다. 중국ㆍ구(舊)소련 동포들의 특례 고용허가제(방문취업제ㆍH-2)는 직장 이동이 자유롭지만, 베트남을 포함한 16개 국적 소유자가 비전문취업비자(E-9)를 갖고 국내에 들어오는 일반 고용허가제는 체류기간 3년간 최대 3번(연장으로 4년10개월 체류 시 최대 5번)까지만 사업장을 옮길 수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 보이긴 하지만, 외국인 근로자들이 사업장 이동이 잦은 건설업 등에 주로 종사한다는 걸 감안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무엇보다 사업장 이동은 사업주의 허락이 있거나 휴업ㆍ폐업, 근로조건 위반 등의 예외적인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게 문제다. 경남 통영의 조선소에서 일한 네팔인 샴(29ㆍ가명)씨는 식사도 제대로 주지 않는 열악한 환경에 사업장 변경을 요청했다가 사업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샴씨는 “귀찮게 한다며 전화기를 던졌고, 경찰에 신고하자 욕을 하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때렸다”고 털어놨다. 게다가 성실근로자 제도를 통해 국내 체류 기간을 연장하려면 3년 동안 한 사업장에서 계속 근무해야 하는 것도 큰 족쇄다.
정부가 지난해 7월부터 시행한 출국 후 퇴직보험금 수령제도도 개악으로 지적된다.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주는 퇴직보험금을 출국 후 14일 내에 지급하는 것인데, 퇴직금을 미리 지급할 경우 불법체류가 늘어나니 본국에 돌아갔을 때 지급하겠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민주노총 산하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관계자는 “금융제도의 차이와 수수료, 환율 등으로 인하여 보험금을 제대로 수령하기 어렵고, 문제가 생겨도 한국을 떠난 후에 해결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면서 “특히 근로기준법 제36조는 퇴직한 날로부터 14일 이내에 퇴직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지급 조건에 차별을 두는 것은 명백한 인종차별”이라고 주장했다. 더구나 농어업 분야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은 휴식시간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처지다. 근로기준법은 주당 40시간 근무를 규정해놨지만 농어업은 특례에 따라 근로시간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끊이지 않는 자살… 고용부는 “성공적인 제도”
이주노조에 따르면 네팔인 근로자의 경우 2015년 9명, 지난해 7명에 이어 올해에만 벌써 5명이 자살했다. 지난 8월 충북 충주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일하던 네팔인 케서브 스레스터(27)도 건강 문제로 회사를 바꾸거나 귀국해 치료를 받고 싶다고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공장 기숙사 옥상에서 목매 숨졌다. 같은 달 충남 천안의 양돈농장에서 일하던 26세 네팔 출신 근로자도 비슷한 이유로 죽음을 택했다. 그나마 조직화가 잘 이뤄진 네팔 근로자들의 사례는 이렇게 외부에 알려지지만, 그 외 외국인 근로자의 경우 그간 몇 명이 어떤 이유로 자살했는지에 대한 통계조차 없다.
우다야 라이 이주노조 위원장은 “고용허가제에서는 사업주가 우리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돌려보내겠다’고 협박한다”면서 “정부는 사업주의 이해관계만 제도에 반영할 뿐 외국인 근로자의 목소리는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더 이상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도 고용허가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고용부는 고용허가제를 ‘성공적인 이주관리 제도’라고 자평 한다. 근로자가 한국으로 들어올 때 사업주가 지불해야 하는 송출비용(여권ㆍ비자 발급비 및 한국어 교육, 합숙훈련비 등 포함)이 산업연수생 제도가 시행되던 2001년 근로자 1인당 3,509달러(약 400만원)에서 2015년에는 942달러(약 100만원)으로 대폭 감소했다는 것이다. 불법체류율도 고용허가제 도입 직전인 2003년 80.0%에 달했지만 2015년 14.1%, 지난해에는 13.9%까지 낮아졌다. 고용부 관계자는 “국제노동기구(ILO)조차도 고용허가제를 아시아의 선도적 이주관리 시스템이라고 평가했다”면서 “또 기본권이 침해되는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사업장 이동이 가능한 만큼 현행 제도 내에서도 충분히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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