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는 예술의 만년 조연이었다. 색을 입고서야 작품 대접을 받았다. 순백의 종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 무위(無爲)였다. 종이는 그렇게 수동적 존재일까.
강원 원주 뮤지엄산에서 열리는 기획전 ‘종이가 형태가 될 때’에선 종이가 변신한다. 공간감과 질감, 무게감을 지닌 조형으로서의 종이. 전병현, 임옥상, 정영주, 송번수, 김인겸 등 국내 작가 26명이 한지, 양지, 골판지로 만든 부조와 설치 등 작품 39점을 선보인다.
종이는 소통의 도구였다. 전시는 디지털 시대가 지운 종이의 역할을 환기한다. 박혜수의 ‘굿바이 투 러브 Ⅰ- 환상의 빛’. 벽에 걸린 커다란 금색 종이는 종이학 1만마리를 접었다 편 작은 정사각형 종이 1만장을 이어 붙인 것이다. 종이학을 꼭꼭 눌러 접어 보내는 마음은 간절한 사랑이요, 더 이상 종이학이 아닌 종이는 시든 사랑이다. 접었다 편 무수한 자국들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흉터. 금색 종이 옆엔 까르띠에 예물 시계 상자가 빈 채로 놓여 있다. 둥지 떠난 종이학처럼, 마음 떠난 사랑의 부재를 실감하게 하는 오브제다. 그러나 사랑은 언젠가 나를 빛나게 한다. 작가가 금색 종이를 고른 건 그래서일 터다.
종이는 그저 평면일까. 김호득의 ‘겹과 사이’에선 종이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반으로 접어철제 구조물에 촘촘하게 건 한지 100장은 멀리서 보면 아기 기저귀처럼 천진하게 늘어져 있다. 종이는 잠시도 쉬지 않는다. 바람에 흔들리고 빛을 먹고 그림자를 만들어 이야기를 꾸며낸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최병소가 석탄의 표면처럼 보일 때까지 연필과 볼펜으로 신문 종이를 집요하게 칠한 ‘무제017’. 신문이 군데군데 찢어질 때까지 인쇄된 글자를 지우면서, 작가는 무엇을 지우려 했을까. 평창 동계올림픽에 맞춰 열리는 이번 전시는 내년 3월 4일까지다.
작품들만큼 빛나는 건 뮤지엄산이라는 공간이다. 해발 275m 산 정상 20여만평(661㎡) 부지에 들어선 미술관은 세계적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작품이다. 산과 하늘이, 건축과 예술이 어우러진 별세계다. 입구에 들어서면 매년 1억원을 들여 가꾼다는 패랭이 꽃밭과 자작나무 숲길, 미술관이 물에 떠 있는 듯 보이는 워터 가든으로 이어진다. 빛과 공간의 예술가인 미국 작가 제임스 터렐의 특별관은 하이라이트. 작품 5개를 감상하는 건 종교적 체험에 가깝다.
원주=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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