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해야한다’는 욕구와 강요 없는 언어
갈등 키우는 명절 대신 기다려지는 명절로
“가족간 배려와 사랑을 아이들 세대에 대물림”
대기업 마케팅팀에 근무하는 조수연(38)씨는 누나만 셋 있는 장손 집안의 아들과 6년 전 결혼했다.
남편은 장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고조부모까지 4대 모두 기제사를 지내는, 전통을 중시하는 가풍의 집안에서 자랐다. 결혼 전 친정엄마의 걱정이 컸던 것은 당연지사. 남편은 “집은 서울, 시댁은 부산이니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을 거야”라고 말했지만, 매달 돌아오는 제사 때면 적잖이 마음이 쓰였다. 드디어 결혼 후 맞은 첫 명절. 허리 한번 펴지 못한 채 하루 종일 전을 부치고 뒷마무리를 하는데, 시어머니가 봉투 하나를 건넸다. “아가, 요 옆 호텔에 숙박 예약해 뒀으니 여기 든 카드로 결제하면 된다. 하루 종일 애썼는데 잠이라도 편하게 자야지. 가서 푹 쉬고 내일 아침에 건너와라.” 갓 시집온 며느리가 낯선 식구들이 북적거리는 집에서 잠 못 자고 뒤척거릴까 배려를 담아 준비해둔 것이다. 미혼이었던 막내 시누이는 “우리 엄마가 이렇게 통이 큰 줄 몰랐다”며 “나는 왜 안 해주냐”고 투정을 부렸다가 핀잔만 들었다.
흔히 회고되는 명절의 풍경이 이렇진 않다. 일가친척이 일용할 음식, 산더미를 방불케 하는 설거지. 주로 여성에게 전가되는 고된 노동과 통증은 명절증후군이라는 말을 낳았다. 화기애애한 거실과는 대조적 분위기로 날카로운 언사와 짜증이 오가는 부엌의 공기. 명절은 종종 여자들을 철학자, 역사가, 변호사로 만든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이 땅에 태어나 어인 연유로 차례라는 이 낯선 무대의 스태프가 됐나. 깨질 것 같지 않은 유구한 전통은 ‘도대체!’ 누가 언제 왜 만들었으며 천지가 개벽하는 동안에도 공고한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내 설움을 호소할 곳은 정녕 법정뿐인가. 돌연 분출하는 질문과 분노는 아내와 남편은 물론 다른 모든 가족들에게까지 명절 증후군을 선사했다.
명절 후 이혼하는 부부가 급증한다는 통계가 진부한지 오래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 바늘방석, 마음고생, 파국을 피할 간단한 진리가 오가는 ‘따뜻한 말 한마디’에 있다는 사실을 일찍 깨친 가족들도 있다. “당연히 해야지”를 “고생 많았다”로 바꿔 말하는 순간, 서로를 지치게 했던 근원적 회의가 한결 누그러지는 마법이 도처에서 펼쳐지는 것. ‘분통 터졌던 명절’의 레퍼토리 틈바구니에서 겸연쩍고 자랑 같아 꺼내놓지 못했던 ‘감동의 한 마디’를 수소문했다.
“호텔 잡아놨다… 잠이라도 편하게 자야지”
시어머니로부터 뜻밖의 ‘외박’ 배려를 받은 조씨는 뭉클했던 당시의 감동을 감추지 않았다.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배려의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정말 감동적이었죠. 어머님이 저 내려오기 전에 미리 그런 준비를 해두셨다고 생각하니, 차례 준비며 일들이 하나도 힘든 줄을 모르겠더라고요.” “장손 며느리, 내가 해봐서 잘 안다”고 종종 말하는 조씨의 시어머니는 “제사는 나까지만 하고 끝낼 테니 너희는 나 죽으면 다같이 모여서 맛있는 거 먹으며 나를 추억해 달라”고 말했다고. 조씨는 “전통과 변화 사이에 낀 세대로 희생만 하고 보답은 못 누리는 시어머니 세대가 안쓰럽기도 하다”며 “세상에는 시월드만 있는 게 아니라 좋은 시어머니들도 많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작 명절 며칠인데 어디서 얼마나 자는 게 대수냐 싶지만, 의외로 적잖은 이들은 ‘편히 자라’는 가족들의 말 한마디에 감동했다. 한 대학병원 임상병리사로 일하는 유선주(32ㆍ가명)씨 역시 “들어가서 눈 좀 붙여라”는 가족들의 말 한마디를 가장 고마운 말로 꼽았다. 절대적 체력을 요구하는 데다 야근이 잦은 업무 특성상 평소에도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유씨는 차례 준비로 새벽같이 일어나 종일 상을 차리고 치우다 보면 매번 탈진 상태에 이른다. “사실 삭신도 쑤시고 너무 고단해서 딱 5분이라도 어디 기대서 졸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거든요. 그럴 때 어머님이 ‘눈치 보지 말고 들어가서 누워 쉬어라. 나도 쉴 테니 다들 눈 좀 붙이자’하시는데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어요.” 유씨는 “형님까지 ‘애기들도 재울 겸 같이 한숨 자자’고 방으로 이끌 때면 한 없이 고맙고 묘한 동지애가 샘솟기도 한다”고 말했다.
“돕고 살아야죠” “형수님 덕분이에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는 속담이 웅변하듯 시누이와 올케 사이가 원만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워킹맘 박민지(40ㆍ가명)씨의 상황은 이런 말과 거리가 멀다. 제사 때면 전업주부인 시누이가 친정에 와서 싫은 내색 한번 없이 늘 음식 준비를 돕는다. 직장에 있느라 급히 얼굴만 비치는 박씨를 위해서다. 박씨가 너무 미안한 나머지 “아가씨는 왜 시누이 노릇도 안 하느냐”고 물었을 정도. “‘언니도 애들 키우랴 회사 다니랴 힘든 거 다 아는데, 돕고 살아야죠’라고 말하는데 뭉클하더라고요. 명절 때 본인 시댁에 가면서는 꼭 문자를 남겨요. 명절 음식 준비하느라 많이 힘들겠지만 기운 내고, 즐거운 명절 보내라고요. 저도 언젠가부터 좋은 물건이나 화장품 같은 걸 보면 아가씨 주고 싶다는 생각부터 들더라고요.”
35년차 맏며느리인 김경자(57ㆍ가명)씨도 차례상이 지긋지긋한 마음 한 켠으로 명절을 기다리는 편이다. 연로한 시어머님을 대신해 홀로 차례 준비를 도맡아 온 지 오래지만, 동서들은 물론 시동생들까지 “돕는 게 당연하다”며 두 팔 걷고 나서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다. 평소 “남자가 어떻게…”라며 설거지 한번 하기를 꺼리는 남편에 비하면, 넙죽넙죽 시장 심부름을 하거나, 전을 부치는 모습이 기특하기 그지없다. 제 형 들으라는 듯 식구들 앞에서 “다 형수님 덕분에 우리 형이 사람 구실하고 사는 걸요”하고 치켜세워 줄 때면 ‘이 맛에 고생한다’싶기도 하다. “솔직히 립 서비스라는 건 다 알죠. 일 돕는 것도 아주 큰 도움은 안되고요. 듣기 좋으라는 번지르르한 말이지만 사람이라 솔직히 기분은 좋더라고요. 명절마다 힘은 들지만 내가 이 제사 뒤집어 엎고 끝낼 입장은 못되고, 어차피 고생할 거 그런 말이라도 듣고 하는 게 좋은걸 어쩌겠어요.”
“차도 막히는데, 친정부터 다녀오렴”
‘감동의 한 마디’로 꼽힌 문장들의 공통점은 일체의 강요가 배제돼 있다는 점이다. ▦어머니라면 마땅히 가족들 위해 상을 차려야만 한다 ▦며느리라면 당연히 시댁에서 자기로 돼 있다 ▦나는 마땅히 여자들이 차린 차례상으로 제사를 지낼 자격이 있다 ▦내가 새 언니에게 일을 시킨 것은 정당하다 등의 욕구와 강요가 보이지 않는다. ‘비폭력 대화’의 저자 마셜 B. 로젠버그는 “부탁을 가장한 강요 대신 원하는 것만 명확히 말하는 긍정적 행동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강조한다. ‘~야만 한다’, ‘당연히 ~하기로 돼 있다’, ‘나는 마땅히 ~할 자격이 있다’, ‘~은 정당하다’, ‘~할 권리가 있다’ 식의 지나치게 욕구에 매몰된 언어는 강요를 낳고, 목적이 달성되지 않을 때 비난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명절엔 시댁부터’의 규칙을 깬 가족들도 적지 않다. 결혼 5년차 직장인 한윤정(33ㆍ가명)씨는 결혼 이듬해 시어머니께 들은 “차도 막히는데, 친정부터 다녀오렴”을 두고두고 마음에 담은 ‘감동 한 마디’로 꼽았다. 한씨는 결혼 후 처음 맞은 설에 시댁인 서울 노원구에서 시간을 보낸 뒤 친정인 경북 문경으로 향했다. 평소 차로 2시간 반이면 족할 거리였지만, 때가 때인지라 5~6시간을 달려서야 겨우 도착했다. “어렵게 내려간 건데, 친정에서 잠깐 잠만 자고 올라와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그런데 어머님께서 그걸 아시고 바로 그 해 추석부터 친정 먼저 가라셨어요. 남편이 외아들이고 시누이도 시댁에 가느라 그렇게 하면 설 당일 오전에 두 분만 계셔야 하는데도… 정말 감사한 마음이었죠.” 한씨는 “죄송한 마음이 컸는데, 어머님께서 ‘꼭 어디가 먼저랄 것보다, 형제들끼리 다 모이는 게 더 좋고 중요하다’고 하셔서 감동하고 많이 배웠다”며 “요즘은 형님 댁과 함께 설 오후에 어른들을 찾아 뵙고 있다”고 말했다.
“너희 세대부터 제사는 없다”
“명절이 기다려진다”는 말로 지인들을 혼란스럽게 해왔다는 결혼 5년차 워킹맘 강수현(36ㆍ가명)씨는 결혼 직전부터 시아버지께 “너희 세대부터는 제사를 안 지내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정말 열린 분이세요. 명절에 세배조차도 부모님께 드리기 전에 부부끼리 먼저 하도록 시키세요. 부부는 서로 가장 존중하고 아껴야 하는 대상인데 그런 마음 없이 명절이라고 부모한테만 절을 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요. ‘부부가 서로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 그게 부합해야 부모님한테 절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하시는데 정말 감동이잖아요. 감사하고 많이 배웠죠.”
이런 이유로 강씨는 결혼 이후 한 번도 제사를 위해 상을 차린 적 없다. 추석 혹은 설 전날 시댁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밥 먹기 전 제삿상 없이 고향쪽을 향해 가족 모두 함께 망배를 하는 것으로 차례를 마친다. 그간 어른들이 차례 전통을 이어온 점을 생각하면, 자식세대에 이처럼 너그럽기는 쉽지 않을 터. 최광현 한세대 상담대학원 교수는 저서 ‘가족의 두 얼굴’에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돌봄과 베풂이 세대를 통해 내려가려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결단이 필요하지만 우리말에 있는 ‘본전 생각난다’는 말처럼 (부모세대가) 자기가 고생한 만큼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더 흔하다”고 강조했다.
강씨의 시아버지 김용길(64)씨는 “예전에는 명절 며칠 전부터 서로 모여 음식을 준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보냈지만 지금은 서로 바빠 헐레벌떡 와서 준비하거나 음식을 사서 형식적으로만 제사 지내는 경우가 많지 않냐”며 “그래서 명절 전 우리 네 형제만 고향에 내려가서 성묘하고 명절 때는 각 가정에서 자식들과 함께 보낸다”고 말했다
“전 차남이지만 큰형님 사정상 10년간 우리 집에서 차례를 지냈어요. 아내가 ‘힘든 건 내 세대에서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계속 내비치더라고요. 저도 동감했고요. 조상에게 예를 갖추는 건 조상과 관계가 깊은 남자 형제들끼리 하는 게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 것이고, 부부가 동등하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일 뿐이죠.”
강씨가 반한 것은 이렇게 열린 두 어른의 사고방식과 아량이다. “저도 이런 가치관과 사랑, 베풂을 아이들 세대에 대물림 해줄 거예요. 어른들이 중히 생각하는 전통은 갸우뚱한 구석이 있어도 저희가 나서 바꿀 순 없잖아요. 이렇게 각자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아끼고 배려하며 관계를, 관점을 바꿔 나가는 게 지금 조건에서 해낼 수 있는 최선 아니겠어요.”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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