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신경계 사실상 모두 파괴돼
유일한 VX 해독제 ‘아트로핀’ 투여했지만 결국 심정지
김정은 북한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 사망 당시 신경계가 사실상 파괴돼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김정남 살해 혐의를 받고 있는 여성 피고인들의 재판에서 나오는 증언들도 김정남의 사망을 맹독성 신경작용제에 의한 타살로 재확인하는 분위기다. 북한은 사망자가 김정남이라는 사실도 부인하고 있으며, 김철(김정남의 여권상 가명)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주장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샤알람 고등법원은 3일 김정남 살해 혐의로 기소된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25)와 베트남 국적자 도안 티 흐엉(29)에 대한 2일차 공판을 진행했다.
이날 공판에는 말레이 정부 소속 법의학자 누르 아쉬킨 오스만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김정남의 혈액 분석 결과 혈중 콜린에스테라아제 효소 농도가 리터당 344개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정상치는 리터당 5,300개 수준이다. 콜린에스테라아제 효소는 인체의 신경계가 적절히 기능하도록 하는 데 기능을 하며, 부족할 경우 근육 마비 등의 증상이 일어난다.
현저히 낮은 혈중 콜린에스테라아제 효소 농도는 신경작용제 VX에 노출됐을 때의 증상과 매우 유사하다. 말레이 당국은 지난 2월 김정남 시신 부검을 통해 안면부에서 VX가 검출됐다고 밝힌 바 있다. 이날 누르 아쉬킨도 “김철(김정남의 가명)의 시신에서 발견된 효소가 정상치보다 적었던 것은 살충제나 신경작용제 같은 독에 의한 것일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VX 신경작용제가 사용됐을 경우 혈중 효소 농도가 급락해 심장과 폐에 문제가 발생하고 땀을 흘리거나 구토를 하는 등 증상을 보일 수 있다고 증언했다. 이 같은 증상은 전날 첫 공판에서 김정남을 첫 진료를 맡았던 공항 의료진이 진술한 당시 상황과 일치한다.
전날 공판에서 진료소 의사 닉 모흐드 아즈룰 아리프 자야 아즐란은 “김정남이 눈은 꽉 감은 채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고, 얼굴에서는 엄청난 땀을 흘리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닉은 VX 신경작용제의 해독제 중 하나인 아트로핀(atropine)을 투여한 뒤 혈압과 혈중 산소 농도가 다소 안정되자 김정남을 인근 병원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으나, 김정남은 이송 도중 목숨을 잃었다. 아트로핀은 VX의 유일한 해독제이지만, VX 작용 속도가 워낙 빨라 해독제를 즉시 주사해야 생명을 구할 수 있다.
VX 가스를 주제로 한 영화 ‘더 록’에서도 주인공인 니콜라스 케이지가 마지막 순간 VX가스에 노출되지만 아트로핀 주사를 자신의 몸에 꽂아 극적으로 살아난다. ‘더 록’에서는 퇴역한 미군 장군(에드 해리슨 분)이 무기고에서 VX가스를 탈취해 미 정부를 협박한다. 생화학무기 전문가 니콜라스 케이지와 전직 SAS 숀 코넬리가 잠입해 VX가스 미사일을 해체하는 내용이다.
‘김정남이 VX에 노출된 사실을 알고 아트로핀을 투여했냐’는 재판부의 질문에 닉은 “김정남이 VX 신경작용제에 노출된 사실은 몰랐다”면서도 “단순히 강심 효과 때문에 아트로핀을 투여했다”고 증언했다. 아트로핀은 심정지를 포함해 쇠약해진 심장의 기능을 회복시키는(강심) 용도로 쓰인다.
김정남이 살해된 지 이틀과 사흘 뒤 각각 체포된 흐엉과 아이샤의 혈중 콜린에스테라아제 효소 농도는 정상치를 보였다. 아이샤의 변호를 맡은 구이 순 셍 변호사는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혈중 효소 농도가 정상치라는 결과는 피고인들이 VX 신경작용제에 노출된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누르 아쉬킨은 VX 신경작용제의 효과는 분량, 농도, 사용형태, 노출시간은 물론 손을 씻거나 해독제를 투여하는 등 방식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반박했다.
아이샤와 흐엉은 지난 2월 13일 오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김정남의 얼굴에 VX 신경작용제를 발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말레이 검찰은 살해 의도를 갖고 범행했다며 살인 혐의로 기소했지만, 두 피고는 리얼리티 TV쇼 촬영을 위한 몰래 카메라라는 북한인 용의자들의 말에 속았을 뿐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해 왔다. 이들에게 VX 신경작용제를 주고 살해를 지시한 북한인 용의자 4명은 범행 당일 출국해 북한으로 도주했다.
호찌민=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