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기차, 버스, 승용차… 민족 대이동 전쟁에 참전해야 하는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무기는 한정돼 있다. 시간과 체력을 아낄 수 있는 좋은 무기는 얻기 힘들 뿐 아니라 가격이 비싸다.
총알을 넉넉히 확보한 상황이라도 ‘복불복 클릭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면 꽉 막힌 길바닥에서 시간과 체력을 소진해야 한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자전거족’에겐 한 가지 선택지가 더 있다. 바로 자전거를 이용하는 것. 이른 새벽부터 예매를 위해 졸린 눈을 부빌 필요 없고 ‘가다 서다’가 무한 반복되는 도로에서 스트레스 받을 이유 없다. 화석연료를 낭비하며 ‘지구온난화 유발자’가 되지 않아도 된다. 정체 원인의 일부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가히 친환경 미래 교통수단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자전거를 이용한 귀성(또는 귀경)이 가능할까. 자전거를 이용해 서울에서 충남 금산까지 약 230km 구간을 달려봤다.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자전거, 장시간 페달을 밟을 수 있는 체력, 넉넉한 시간 등 몇 가지 준비만 있다면 ‘가능은 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안전한 경로 탐색
먼저 어떤 경로를 이용할지 웹지도를 이용해 찾아봤다. 네비게이션을 이용할 수 있는 자동차와 달리 스마트폰 지도 어플리케이션에 의존해야 하는 자전거는 새로운 곳에서 헤매기 쉽다. 터널이나 지하차도, 고가도로와 같이 자전거가 이용하기에는 위험한 도로도 많다. 차량과 통행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위험한 곳을 피해 빠르고 정확한 경로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길을 제대로 알아야 시간적, 체력적 낭비를 줄일 수 있다.
평소 자주 이용하는 포털 지도에서 출발지점과 도착지점, 경유지 5곳을 설정하고 이동수단으로 자전거를 선택했다. 경유지는 고도가 높은 고개와 터널을 피해가는 경로를 설정하기 위해서다. 검색결과 이동거리 약 230km, 예상 소요시간은 약 15시간. 중부지방이 통째로 보이는 지도엔 단순한 경로가 표시됐다. 남쪽으로만 가면 된다. 하지만 지도를 확대했더니 얘기가 달라졌다. 방향을 바꿔야 하는 갈림길만 300곳이 넘었다. ‘자전거 통행 주의’라는 붉은 색 문구도 곳곳에 표시돼 있었다. 시작 지점부터 모의주행 해보고 경로 인근의 맛집이나 카페에서 식사와 차를 즐길 생각이었지만 곧바로 접었다. 하나하나 일일이 살폈다간 날 샐 판이었다. ‘가면서 생각하자. 달리기도 전에 힘 빼면 안 된다’ 자전거 전용도로 위주로 달리고 큰 갈림길만 머리 속에 담고 헷갈릴 땐 무조건 멈춰서 다시 지도를 확인하자는 원칙만 세우고 경로 찾기는 정리했다.
장거리 이동할 때 준비물
평상시 자전거 탈 때와는 다른 준비물이 필요했다. 도심 외곽의 한적한 길을 장시간 달려야 하기 때문에 간단한 정비와 펑크에 대비할 수 있는 도구는 필수. 평소 무겁다는 핑계로 갖고 다니지 않았던 공구와 튜브에 펌프까지 단단히 챙겼다. 자전거의 브레이크 상태를 점검하고 타이어 공기압도 확인했다. 체인은 세척하고 기름칠도 새로 했다. 블랙박스용 카메라는 다시 충전하고 메모리카드도 깨끗하게 비웠다. 대낮에 멀리서도 잘 보이는 후미등도 준비했다.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질 때를 대비해 에너지 보충제와 간단한 먹거리도 챙겼다. 카드 결제가 되지 않는 상점을 이용할 상황에 대비해 비상용 현금도 챙겼다. 준비를 모두 마치니 오후 11시가 훌쩍 넘었다.
날이 밝자 출발~
출발 시간은 날이 적당히 밝아진 오전 6시로 정했다. 어두워지기 도착하려면 이른 시각에출발해야 한다. 5시 30분에 일어나 시리얼로 간단하게 식사를 마쳤다. 안장에 올라 페달을 밟기 시작한 시간은 정확히 오전 6시 3분. 흐린 날씨에 공기는 살짝 축축했다. 기온은 19도로 자전거 타기에 나쁘지 않은 날이다. 처음부터 밟았다간 나중에 퍼질 수 있기에 숨이 가쁘지 않을 정도로만 부드럽게 페달을 돌렸다.
한강과 탄천으로 이어지는 자전거도로를 이용해 서울을 빠져나가는 데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른 시간이라 이용하는 시민들이 거의 없는 강변의 자전거도로는 매우 평화로웠다. 그렇게 고요하고 차분하게 2시간 동안 달리자 자전거도로는 끝났다.
첫 번째 휴식과 일반도로 진입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렸더니 물통은 바닥을 드러냈고 허기도 느꼈다. 운 좋게 자전거 도로가 끝나는 지점 인근에 편의점이 있었다. 이곳에서 첫 번째 휴식을 취했다. 삼각김밥과 소시지로 영양분을 보충했다. 1.5L짜리 이온음료의 절반은 마시고 나머지는 물통에 채웠다. 지금까지 평균속도를 확인해 보니 27.8km/h. 힘을 아끼며 이동한 것 치곤 나쁘지 않다. 경로도 다시 확인했다. 이러는 사이 15분이 훌쩍 지났다. 날이 어둡기 전에 도착하려면 휴식도 적당히 해야 했다.
다시 안장에 올랐다. 이제 평온한 자전거도로가 아닌 도로에서 차와 함께 달려야 한다. 굉음을 내며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대형트럭, 버스에 잔뜩 졸아 붙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통행량이 많지 않아 자전거가 다른 차량 이동을 방해할 가능성이 적다는 점. 차량 운전자가 잘 보이도록 후미등의 밝기를 최대로 올렸다. 방향이나 차선을 바꿔야 할 때에는 평소보다 더 크게 손짓해 자전거의 존재를 알렸다.
차들 눈치 보며 공용도로 달리기
첫 번째 휴식을 취한 곳부터 약 100km 구간은 일반 도로를 이용해 차와 함께 달려야 한다. 보행자 겸용 자전거도로가 설치돼 있는 곳이 있었지만 이용하기 불편하고 위험해 보행자와 사고 가능성도 높아 이용하지 않았다. 도로 옆 보도에 설치된 자전거도로는 자전거 이용자의 실질적인 편의를 고려치 않은 ‘무늬만 자전거도로’가 대부분이었다.
자동차 눈치 보며 다시 열심히 달렸다. 오산시내를 지날 때 불법 주ㆍ정차한 차량 운전석 문이 갑자기 열려 부딪힐 뻔 했다. 부딪혀 넘어졌더라면 다른 차선의 차량과 2차 사고도 날 수 있는 상황. 째려 보며 무언의 항의를 했지만 운전자는 오히려 인상을 찌푸리며 역정을 냈다. 언쟁을 벌이는 데 에너지를 소모할 여유가 없어 그냥 계속 페달을 밟았다. 신도시 건설이 한창인 경기 화성시 동탄의 텅 빈 대로에선 이유 없이 대형 트럭의 경적 세례를 받기도 했다. 약자인 자전거 이용자를 보호하기보단 위협 대상으로 삼는 차량 운전자를 아직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특히 엔진음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인 대형 화물차는 자전거 이용자에겐 공포의 대상이다.
그렇게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2시간 정도를 달려 드디어 충청남도에 진입했다. 서울 경기를 벗어나는데 4시간 정도 걸린 셈. 이동거리는 100km가 좀 넘었다. 간담을 서늘케 하는 운전자들과 구름 낀 날씨 덕에 더위를 피해 큰 힘 들이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순대국 한 그릇으로 기력 보충
충남 천안시 성환읍을 지나는데 성환 순대타운이 눈에 들어왔다.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식당이 보여 그곳에서 이른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자전거를 식당 밖에 두고 들어갔더니 주인으로 보이는 이가 “그렇게 두면 자전거 도둑 맞으니 안으로 갖고 오시라”며 손수 자전거 세울 공간을 마련해 줬다. 자전거족에 호의적인 사람을 만나는 일은 참 반가운 일이다. “아들이 공부는 안 하고 만날 자전거만 타서 걱정이다”라며 푸념한 그는 자신이 만든 순대국을 크게 한 숟가락 떠 생김치를 올려 입에 넣었다. “하루에 한 끼는 무조건 우리집 순대국을 먹는다”는 그의 말에 메뉴 선택의 고민은 사라졌다.
그와 자전거에 날씨를 곁들인 이야기를 하며 순대국을 순식간에 비웠다. 두둑해진 배를 두드리며 식당을 나왔더니 구름이 걷힌 파란하늘이 눈부셨다. 올 것이 왔구나. 이제 태양과 정면으로 싸워야 한다. 자외선차단제를 두껍게 바르고 다시 안장에 올랐다.
슬슬 고통이 다가오는 시간
중천의 해를 피할 길이 없었다. 아스팔트는 계속 뜨거워졌다. 신호에 걸려 멈추기라도 하면 뜨거운 열기를 고스란히 받았다. 달리며 바람을 맞는 것이 더위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이다.
130km 정도 달렸을까. 서서히 여러 곳에서 좋지 않은 신호를 보냈다. 목, 허리에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여유 있을 때마다 스트레칭을 하며 계속 달렸다. 그렇게 다시 20km 정도를 더 달려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 읍에 다다랐다. 점심식사를 한 뒤 2시간여 만에 다시 50km를 달렸으니 페이스는 아직까지 좋은 편이었다.
편의점에 들러 수분을 보충하며 휴식을 취했다. 신발을 벗고 발을 의자에 올렸더니 천국이 따로 없다.
자전거 천국에서 다시 복잡한 도시로
세종시를 통과하는 30km 구간은 자전거전용도로를 이용할 수 있다. 자동차 눈치보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자전거전용도로는 체력이 떨어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엄청난 호재다. 금강변을 따라 설치된 자전거도로 위에선 눈이 시원해지는 풍광을 만끽할 수 있었다. 자동차로부터 완전히 멀어진 이곳에선 자전거 바퀴가 지면과 닿으면서 내는 마찰음과 톱니와 맞물려 돌아가는 체인의 화음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심해질 것 같던 목 허리 통증도 사라졌다.
세종시와 대전 유성구를 잇는 자전거도로는 이색적이었다. 도로 중앙에 설치된 자전거도로는 철제 울타리로 차도와 완전히 구분돼 자전거가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도록 했다. 도로 지붕에는 태양광을 이용해 발전할 수 있는 시설이 설치돼 있다. 이곳에서도 역시 마음 편히 달릴 수 있었다. 그렇게 휴식 같은 90여분 간의 이동이 끝나고 다시 복잡한 시내가 나타났다.
대전시를 통과하는 대부분 구간엔 인도에 자전거가 다닐 수 있도록 설치한 보행자 겸용 자전거도로가 설치돼 있었다. 원칙적으로는 이곳으로 가는 것이 맞지만 장애물이 너무 많고 ‘가다 서다’를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자전거로 이용하기에는 매우 불편하다. 자동차와 함께 도로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기어코 “자전거는 자전거도로로 올라가 타라”는 대형트럭 기사의 고함을 들었다. 오른손을 높이 들어 ‘알겠다, 미안하다’고 표시했지만 계속 도로의 맨 우측 차선을 이용해 달렸다.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대전시내를 빠져 나오니 어느덧 이동거리는 200km를 넘어섰다. 교차로 신호대기하며 틈틈이 쉴 수 있었지만 서서히 체력적 한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20km 남았다’ 마지막 스퍼트
시내를 빠져 나와 편의점에서 다시 멈췄다. 초코우유, 콜라로 수분과 당분을 보충했다. 이온음료로 다시 물통을 채웠다. 남은 거리는 약 20km. 이제 한 시간 정도만 달리면 된다. 발과 목을 열심히 주무르며 마지막 스퍼트를 준비했다.
다시 안장에 올라 페달을 밟기 시작한 지 10분이나 지났을까. 목, 등, 허리에 이어 사타구니에서 통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다리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주머니에 넣어뒀던 에너지 보충제를 꺼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빨아 마셨다. 이때 뒤쪽에서 오던 버스가 경적을 울리며 옆으로 바짝 붙어 지나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다 왔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꾸역꾸역 페달을 밟았다. 플라타너스 가로수 예쁘게 줄지어 있는 도로를 지나 드디어 대전과 충남 금산의 경계인 터널 앞에 이르렀다. 다시 힘이 불끈 솟았다.
터널을 통과하니 반대편에서 자전거를 타던 이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반가운 마음으로 답례했다. 20여 분을 더 달려 마침내 고향집이 있는 동네에 들어왔다. 돼지 축사, 젖소 목장에서 내는 ‘고향의 향기’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송편을 빚고 계시던 어머니와 이웃은 “서울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왔다”는 말에 박수를 치며 반겨주셨다. “사고 없이 무사히 온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어머니의 말에 230km, 12시간의 귀성길을 사고 없이 완주했다는 것을 실감하며 가쁜 숨 사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