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20년 동북아 정세는 해방 직후의 한반도 정세만큼이나 급박했다. 18년 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의회 연두교서(평화원칙 14개조)에서 밝힌 ‘민족자결주의’가 해외파 독립운동가들을 통해 식민 치하의 한반도에 전해져 국내 및 일본과 중국ㆍ러시아 독립운동가와 청년들을 고무시켰다. 이듬해 2월 일본 도쿄의 2ㆍ8독립운동, 한 달 뒤 한반도 전역에서 시작돼 근 석 달 가량 이어진 3ㆍ1운동. 35년 일제 치하의 조선 독립 열기가 가장 뜨겁게 달아오른 시기였다. 중국의 5ㆍ4운동, 인도의 반영운동, 베트남 필리핀 등의 독립운동도 저 무렵 가장 뜨거웠다.
조선과 국경을 맞댄 중국 북간도의 한인 무장독립운동 세력들이 전력을 보충하고 전열을 가다듬은 시기가 또 저 무렵이었다. 20년 당시 독립군 무장부대 병력은 약 3만 명에 달했다. 조선총독부는 국내 통치 기조를 군대ㆍ경찰에 의한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회유)통치로 전환했지만, 해외 무장세력들에 대해서는 강경 토벌 작전으로 전환했다. 그 신호탄이라 할 만한 사건이 1920년 10월의 이른바 ‘훈춘사건’이었다.
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직후 국제연맹 조사위원회에 파견된 중국측 대표단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인은 이미 “동북3성과 내몽골 전답의 85%”와 “간도 4개현 전답의 약 절반”을 소유하고 있었다. 일제는 항일무장투쟁의 경제적 토대가 간도의 농민이라 여겼다. 그들 중 상당수는 중국으로 귀화했지만, 일본 국적법은 조선인의 귀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토지 소유ㆍ조차권과 가축 거래의 제한을 두고 일본은 중국 중앙 및 현 정부와 갈등을 빚었다.
훈춘 사건은 1920년 9월 12일과 10월 2일, 마적단이 훈춘 시가를 습격해 중국인과 조선인을 살해하고 약탈ㆍ방화한 사건이다. 특히 2차 약탈 땐 치외법권지역이던 일본 영사관을 불태우고 일본인 거류지까지 공격했다. 일주일 뒤 일본군은 ‘제국신민 보호’를 명분으로 간도 일대 조선인 등 약 3,500명을 무차별 학살하는 이른 바 ‘간도 참변’(20.10.9~11.5)’으로 대응했다.
훈춘 사건의 주체와 배후를 두고 설이 분분하다. 독립군 거점 분쇄를 노린 일제의 자작극이라는 설이 우세하지만, 항일 성향의 중국 자위부대와 일부 독립군이 개입했다는 설도 있다. 최윤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