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러슨, 中서 시진핑과 회동 후
“北과 직접채널 2, 3개 유지”
트럼프, 하루 만에 트위터로 질책
“리틀 로켓맨과 협상 시도는 낭비”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북한과 2~3개의 직접 채널을 열어두고 대화 의사를 타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엔 총회 연설을 계기로 미북간 ‘말 전쟁’이 격화돼 한반도 일대 군사적 긴장이 극도로 높아진 상황에서 긴장 완화를 촉구하는 메시지로 풀이된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틸러슨 장관의 대화 시도를 ‘시간 낭비’라고 일축하며 엇갈린 목소리를 내 미국의 대북 정책 혼선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중국을 방문한 틸러슨 장관은 이날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등과 회동한 후 주중 미국 대사 관저에서 기자들과 만나 “우리가 (북한의 대화 의지를) 살펴 보고 있다.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그는 “우리는 (북한에) ‘대화를 하고 싶은가’라고 묻고 있다. 우리는 평양과 2~3개의 채널을 열어두고 있다. 블랙 아웃(black out) 같은 암담한 상황은 아니다”고 말했다. 틸러슨 장관은 “우리는 대화할 수 있다. 대화하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중국을 통한 채널이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흔들며 “직접적이다. 우리 자신의 채널이다”고 말했다.
그간 유엔주재 북한 대표부와 미 국무부간의 이른바 ‘뉴욕 채널’ 등을 통해 북미간 접촉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트럼프 정부 고위 인사가 북핵과 관련해 이를 인정한 것은 사실상 처음이다. 지금까지 트럼프 정부가 공식 확인한 북미 접촉은 북한에 17개월간 억류됐다가 6월 석방된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 송환 협상으로 북핵과는 무관하다는 게 미국 정부의 설명이었다.
다만 뉴욕채널을 비롯해, 북한 외무성 관계자와 미국 전직 관료나 학자 등이 참여하는 1.5 트랙(반관반민)의 접촉에서도 북한의 태도 변화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워싱턴포스트(WP)는 최근 1.5 트랙 참여자를 인용하며 북한이 중국이 제안한 쌍중단(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중단과 한미의 군사훈련 중단)조차도 거부했다고 전했다. 헤더 노어트 국무부 대변인도 틸러슨 장관 발언 이후 성명을 내고 “미국은 현 정권 붕괴 촉진, 체제 변화 추구, 한반도 통일 가속화, 비무장지대(DMZ) 이북 군사력 동원에 관심이 없다는 확언을 했음에도 북한은 비핵화 대화에 관심이 있거나 준비가 돼 있다는 어떤 신호도 보여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런 물밑 교착 상태에서 틸러슨 장관이 갑작스럽게 북미 직접 채널을 시인하며 공개적으로 대북 대화 메시지를 강조해 국면 전환 가능성이 주목됐다. 이번 메시지가 시 주석을 비롯해 왕이 외교부장, 양제츠 국무위원과의 회동 이후 나왔다는 점에서 중국으로부터 모종의 언질을 받은 게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됐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하루 만에 트위터를 통해 틸러슨 장관을 공개적으로 질책하면서 대통령과 행정부간 불협화음만 노출한 셈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1일 오전 트위터에 “리틀 로켓맨과 협상을 시도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틸러슨 장관에게 얘기했다”고 틸러슨 장관의 대북 대화 시도를 일축했다. 그는 이어 “렉스, 당신의 에너지를 아껴라”며 “우리는 해야만 할 일을 할 것”이라고 적었다.
북핵 해법을 두고 틸러슨 장관이 트럼프 대통령의 기조와 불협화음을 빚은 것은 물론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틸러슨 장관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도 “지금 전반적 상황이 다소 과열돼 있다”며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중단하면 상당히 상황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발언 수위를 조절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모든 사람이 상황이 진정되기를 바라고 있다”며 답변을 피했지만 북한 뿐만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우회적으로 자제를 요청하는 메시지를 낸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공개 면박으로 외교 정책에 책임을 진 미 국무부의 위상도 더욱 추락하게 됐다. 미 정부 고위 관계자는 WP의 인터뷰에서 “틸러슨 장관의 발언에 무게를 두면 잘못이다. 미국은 이전 정부의 암흑기에도 채널을 유지해왔다”며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이 같은 혼선은 미 국무부가 강조해 온 대화를 통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법 노선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틸러슨 장관은 북한을 대화 테이블에 앉히기 위해 현 정권 붕괴를 촉진하거나 정권 교체 의사가 없다는 등 이른바 ‘4 NO’ 를 거듭 강조해왔으나, 발언의 신뢰성 자체가 현저히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북한이 대화 테이블에 앉기에는 서로의 전제 조건이 너무 차이가 큰 점도 대화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요소다.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최근에도 핵 사찰 수용과 핵무기 포기 의사 표명을 대화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북한이 핵무기 완성을 코 앞에 둔 상황에서 ‘비핵화 의지’를 대화 조건으로 고수하는 미국의 요구에 응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게 상당수 전문가들의 견해다. 북중간 소통이 단절돼 있고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자체가 급격히 떨어져 있다는 관측도 많아 북미간 대화를 중재할 국제적 리더십도 부재한 상태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미국국장이 29일 러시아를 방문, 중국 대신 러시아와의 접촉을 강화하며 활로를 모색하는 모습이다.
북한은 이달 10일 당 창건일을 전후로 추가 도발에 나설 가능성이 여전히 높고, 이달 중순께는 미국의 핵추진 항공모함이 동해상으로 출동해 우리 해군과 고강도 군사훈련에 나설 예정이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여전히 상황 전개를 낙관하기 어렵게 하는 시계 제로 상태다.
워싱턴=송용창 특파원 hermee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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