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신군부 사람’이란 오해 늘 억울해 해
최규하, 신군부 지지 받아 대통령 할 걸로 착각
계엄 반대 안한 과오? 당시 상황 몰라서 하는 말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증인이었다.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역사적 격변기에는 그 한복판에 서있던 인물이다. 침묵으로 생을 마감한 지 만 10년, 아들 신철식 우호문화재단 이사장이 최근 ‘신현확의 증언’이란 책을 냈다. 그를 만나 아버지가 전한 역사의 뒷얘기를 들었다.
_부친께서는 왜 회고록을 내지 않았습니까?
“역사란 시간이 지나면 밝혀진다, 내가 내 입으론 말 못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녹음기 들이밀고 ‘그럼 다른 입으로 할 테니 말씀하시라’고 했습니다. 그게 이 책이고요.”
-1980년 봄, 대학가 시위에서 부친은 신군부쪽 사람으로 알려져 타도 대상이었는데요.
“아버지는 늘 그게 안타깝고 억울하다 하셨습니다. 바로 그런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습니다.”
_10ㆍ26 이후 정부의 실권이 신 총리에게 있었기 때문 아닌가요.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이 제 역할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장관들이 보고하러 가도 만나주지를 않으니 그 아래 상급자인 아버지에게라도 와서 상의할 수 밖에요. 그러니 바깥에선 신현확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비치고, 신현확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_최 전 대통령은 왜 그랬을까요?
“신군부에 업혀서 나중에 다시 대통령을 하려 한 게 아닌가 아버지는 생각했습니다. 1980년 7월30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뜻을 받은 김정렬 전 국방장관이 최 대통령에게 하야를 종용했는데 군부가 자신을 지지한다고 착각한 최 대통령이 “왜 물러나느냐”고 반발했다고 합니다. 결국 군부가 재차 사람을 보낸 뒤에야 물러났죠.”
-전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펴낸 회고록에서 최 대통령이 김 전 장관을 만났을 때는 이미 하야 결심을 굳히고 상의하려 했던 것으로 신군부 압박은 음해라고 주장했습니다.
“김 전 장관은 아버지와 자유당 시절부터 잘 알고 지냈지만 최 대통령과는 별 친분이 없었습니다. 최 대통령이 잘 알지도 못하는 분을 만나 그런 내밀한 얘기를 했다는 게 말이 되나요.”
_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아버지에게 대통령을 제안했고, 그때 “건방진 놈”이라며 호통을 쳤다고 회고록에 돼있던데 미화한 건 아닌가요?
“지금이야 전두환이라면 총칼로 권력을 잡은 강한 인물이라 생각하지만, 12ㆍ12 당시엔 별로 유명하지 않은 장군 가운데 한 명이었을 뿐입니다. 아버지 입장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는 나이 50도 채 안된, 새파란 투 스타짜리 군인에 불과했습니다. 아버지 막내 동생의 동창이 노태우였고 전두환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거리낌없이 맞담배 피던 관료들의 대부였던 아버지와 갓 사회에 얼굴을 내민 전두환과는 비교조차 안됐습니다.”
_신 총리가 직접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는데요.
“10ㆍ26이 하극상이었고, 신군부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제거한 12ㆍ12도 하극상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자신이 최 대통령을 제거해 대통령이 되는 또 다른 하극상만큼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_전 전 대통령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껄끄러웠겠습니다.
“자신에게 대놓고 반대한 유일한 사람이라 좋지 않게 봤지만 그렇다고 고향의 큰 어른 같은 분을 함부로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전 대통령 퇴임 뒤였으니까 아마 1988년쯤이었을 겁니다. 한번은 골프장에서 아버지와 우연히 마주쳤는데 전 전 대통령이 달려와서는 ‘그 동안 서운한 게 있으셨다면 죄송합니다’라고 깍듯하게 인사하곤 넙죽 큰 절까지 올리기도 했습니다.”
_신 총리는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처음부터 시나리오가 있던 건 아니고 유동적이었던 것 같다고 봤습니다. 10ㆍ26 자체가 우발적이었으니까요. 그러다 신군부는 12ㆍ12를 통해 군부내 반대파를 제거하면서 권력이 자신들에게 쏠리는 것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권력 장악 계획은 그 이후 상황 변화에 따라 굳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 정치권과 국민들의 계엄 해제 요구에 신군부는 물론이고 정부도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그 게 결국 신군부 집권을 도와줬고 신 총리가 비판 받는 부분도 그 대목인데요.
“지금이야 이런저런 상상을 할 수 있는데, 당시 상황에선 황당한 얘깁니다. 1980년 4,5월엔 모든 정치인이 다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더러 당신이 뭔데 경제정책을 그대로 이어나가냐고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연일 도심시위로 경찰은 군대 출동을 수시로 요청했고, 신군부는 불러만 달라고 할 때였습니다. 훗날 어떤 사람은 아니 할 말로 할복이라도 해서 막지 그랬느냐고 하는데, 당시 상황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신 총리가 물러난 건 5ㆍ17 계엄 전국 확대조치에 반발해서였죠?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 계엄법상 내각이 무력화되고 군부가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10ㆍ26 당일 밤 김재규가 국무회의에서 계엄 전국 선포를 요구했을 때 아버지가 유일하게 부분계엄을 주장해 관철한 것도 군부 실권 장악을 우려해서였습니다. 그날로 초법적인 쿠데타가 완성돼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절감한 겁니다.”
-노 전 대통령과는 관계가 좋은 편이었죠?
“노 전 대통령에 대해선 두 가지 감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어차피 전두환과 한통속이라는 것이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어쨌든 막내 동생의 친구이고, 조언을 자주 구해 도와주고 싶어하기도 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5공화국 때부터 뭔가 좀 어렵다 싶으면 언제나 ‘어르신 의견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었거든요.”
-6ㆍ29선언과 3당합당에 대한 조언을 아버지가 했다고 회고록에 돼있던 데 사실입니까?
“1987년 4ㆍ13 호헌조치 후 시위가 심해지자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밤 늦게 아버지를 찾아와 ‘제가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어 ‘자네가 살 길은 직선제밖에 없네’라고 정면돌파를 권유했습니다. 3당합당은 노태우 정권 말기 여권에 변변한 대선후보가 없어 전전긍긍하길래 이제 군인도 안되고 여당도 안되니 못마땅하더라도 야당과 합쳐야 하고 다음 대통령은 YS가 되는 게 순리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런데 ‘노태우 회고록’엔 아버지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데요.
“아버지 얘길 되도록이면 다 뺐을 겁니다. 군부정권의 막후 실세처럼 비치는 걸 질색하는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조언은 노 대통령과 테니스를 자주 치던 막내 동생 등을 통해 비밀리에 전달됐습니다. 3당합당 같은 경우 아버지와 YS의 메신저로 저와 YS 아들 김현철씨가 역할을 했습니다.”
대담=이충재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정리=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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