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맑은 눈빛을 보면…’ 김광석, 서연이에 대한 기록
‘서연이는 키도 컸고 더 건강해져서 할머니가 따라다니기 바쁘다.’ 가수 김광석(1964~1996)은 외동딸 생각만 하면 울컥했다. ‘’엄마 어디 있어’하면 양손을 하늘로 쭉 뻗으면서 어!어!해 마음이 아파 눈물이 핑 돌았다’. ‘또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공연을 자주 하다 보니 딸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 아빠의 애타는 마음이 아리다. 예비군 훈련 받고 집에 온 김광석은 딸을 생각하며 편지(에세이 ‘미처 다하지 못한’ㆍ2013)를 쓴다. 1993년 7월5일 일이다.
‘네 맑은 눈빛을 보면 온 세상이 맑고 끝없이 보여.’ 김광석은 여느 아버지처럼 ‘네가 나의 자랑’이라며 하루가 다르게 무엇인가를 배우는 딸을 보며 위안을 얻었다.
김광석에게 1991년 결혼한 해 얻은 서연이는 각별했다. 그는 병원에서 딸을 직접 받았다. 김광석은 ‘의사는 출근 전이었고, 간호사는 산모의 출산 준비로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이라 기억했다. 딸을 얻고 김광석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까지 변했다. 병원 밖으로 나선 김광석에게 거리의 사람들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저마다 소중히 태어난 우리/열린 마음으로 그저 바라봐.’ 그렇게 나온 곡이 ‘자유롭게’(1994)였다. 지갑 속에 딸 사진을 꼭 넣고 다녔다는 김광석은 3집 ‘나의 노래’(1992)에 딸을 위한 ‘자장가’도 실었다.
딸과 친해지길 원했고 누구보다 건강하길 소망했던 아빠의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발달 장애를 앓던 서연양은 2007년 12월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서연양은 당시 16세로 방학을 며칠 앞둔 상황이었다. 김광석의 부인이었던 서해순씨는 지난 25일 JTBC ‘뉴스룸’에 나와 서연이가 자다가 깨 물을 달라고 한 뒤 갑자기 집에서 쓰러졌다고 주장했다.
극과 극 증언ㆍ수사 불신이 키운 ‘김광석 타살 의혹’
서씨가 서연양의 사망 소식을 10년 동안 주변에 숨겨온 일이 최근에서야 뒤늦게 알려져 세간을 놀라게 한 가운데 허망하게 떠난 김광석을 향한 대중의 그리움도 더욱 짙어지고 있다. 서연양의 석연찮은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김광석의 의문스러운 죽음이 자아낸 타살 의혹에 다시 불을 붙였다. 김광석에 이어 딸까지 미스터리하게 세상을 떠나면서 부녀를 바라보는 안타까움이 더 강해지면서 벌어진 일이다.
김광석 타살 관련 의혹은 최근 개봉한 영화 ‘김광석’과 맞물려 온라인에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김광석은 1996년 1월 자택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다. 부검 결과 그의 목 앞부분에만 발견됐다는 삭흔(목에 끈을 둘렀을 때 남는 자국)이 누군가 뒤에서 목을 감아 졸랐을 때 나온 흔적이었다는 것부터 끈의 길이가 매달려 죽기엔 짧았다 식의 의혹이 쏟아지고 있다. “스스로 목을 매면 체중이 목에 실려 목 앞 위쪽에 삭흔이 날 수 밖에 없고, 자신의 키보다 훨씬 낮은 곳에 다양한 방법으로 목을 매 죽은 사람이 많아 끈의 길이는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박훈 변호사)는 전문가 의견은 경찰의 초동 수사에 대한 불신 때문에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는 분위기다.
김광석의 사망에 대한 의혹이 끊이지 않는 데는 고인의 사망 직전 행보를 둘러싸고 극과 극의 얘기가 쏟아진 탓도 크다. 김광석이 숨진 채로 발견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내년)봄에 열 공연 얘기”(가수 박학기)를 하고 새 음반 발매를 위한 계약을 맺으며 음악 활동에 열을 올렸지만, ‘장모에게 전화해 (아내와) 이혼하겠다’고 알리려 했다는, 그의 혼란을 추측할 수 있는 증언이 뒤죽박죽 얽혀 사건은 더욱 미궁으로 빠졌다.
‘일어나’라고 했던 가객인데
“아직 그런 느낌은 안 들어요.” 밴드 산울림 멤버인 김창완은 1996년 1월 6일 김광석의 사망 소식을 전한 MBC ‘뉴스데스크’와 인터뷰에서 ‘김광석의 죽음이 아깝지 않으냐’는 질문에 무표정으로 이같이 답한다. 김광석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그의 사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느낌이 역력했다.
대부분 음악인의 반응이 비슷했다. 김광석은 술과 사람을 좋아했다. 그의 가족에겐 “장난이 엄청 심한”(친형 김광복씨) 어리광 많은 막내였고, 후배 사이에선 “자신을 (활동했던 밴드)동물원의 조랑말이라 소개할 정도로 엉뚱한”(가수 박기영) 동네 형 같은 존재였다. 누구보다 정 많고 유쾌했던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해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김광석은 노래 ‘내 사랑 내 곁에’로 유명한 김현식과 똑같은 나이(32세)에 요절했다. 죽음에 대한 슬픔의 깊이가 다를 순 없다. 김광석의 죽음에 더 많은 이들이 애달파 하고 그를 못 잊는 건 그가 남긴 정서의 유산이 큰데다, 무대에서의 모습과 정반대되는 충격적인 방식으로 삶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생긴 괴리감이 커서다. 김현식은 그가 남긴 곡처럼 야인처럼 살다 갔지만, 김광석은 반대였다.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일어나’)라고 희망을 주고, ‘여보 그 때를 기억하오’(‘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라며 삶을 예찬한 김광석의 자살은 그를 사랑했던 음악팬들에겐 쉽게 받아들 수 없는 숙제였다. 김광석의 죽음을 많은 이들이 잊지 못하는 이유다.
그런 ‘가객’에겐 추억의 유효기간도 비껴간다. 세상을 떠난 지 21년이 지난 20세기 가수는 지금까지도 소환되고 있다. 지난해 교양프로그램 ‘감성과학프로젝트-환생’에서 김광석을 조명한 김상무 KBS 교양국 책임프로듀서(CP)에 따르면 시민 2,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김광석이 살아 있다면 ‘구의역 사건’ 등 청년의 아픔을 공감했을 것이란 답변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청춘은 ‘어른’이 사라진 시대 ‘가객’의 노래에 기대고, 중년은 공감의 노래로 꾸준히 김광석을 찾고 있다.”(지혜원 문화평론가)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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