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께 40년간 혹독한 밥상머리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때 들었던 여러 일화들을 그냥 내버리기엔 아까워서, 이제는 2017년이니까,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까 밝혀두는 게 어떨까 싶어 책으로 묶어 냈습니다.”
아버지 신현확(1920~2007) 전 총리의 삶을 다룬 책 ‘신현확의 증언’(메디치)을 낸 신철식(63) 우호문화재단 이사장이 2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출간 소회다. ‘TK 마피아의 대부’라 불리는 신 전 총리는 이승만 정권 부흥부장관, 박정희 정권 경제부총리, 1980년 5월의 봄 당시 국무총리, 이병철 삼성 회장 당시 삼성물산 회장 등을 지내면서 20세기 한국 현대사의 주요 장면들을 지켜본 인물이다. 책은 세세한 읽을 거리를 담고 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씨앗은 1958년에 뿌려졌다
우선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한강의 기적’을 일군 이 계획은 원래 박정희 정권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가 지금은 4ㆍ19 이후 장면 정권이 만든 것을 박정희 정권이 이어받은 것이라 하고 있다. 신 이사장은 그 뼈대가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58년에 만들어졌다 주장했다. 당시 부흥부 장관이었던 신 전 총리는 미국 원조정책 변화에 따른 대응책을 모색하다 미국 모델을 본 따 대통령령으로 ‘산업개발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에 모인 브레인들을 중심으로 ‘경제개발3개년 계획’이 1959년 만들어졌다. 이 계획의 실행은 4ㆍ19와 5ㆍ16 때문에 늦춰지다 박정희 정권 들어서 그 조직과 아이디어가 ‘건설부 종합계획국’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 말 경제안정화 정책을 둘러싼 갈등
전두환 정권 당시 김재익 경제수석의 작품으로 알려진 경제 안정화 정책 또한 마찬가지다. 박정희 정권 붕괴 원인으로 40%대에 이르던 인플레가 흔히 지적된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통제하지 못해 급격히 붕괴했고, 이후 전두환 정권이 안정화 조치를 성공시켜 ‘저물가’ 신화를 만들어냈다는 게 줄거리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말기 경제부총리에 오른 신 전 총리는 ‘경제안정화조치’를 추진했다. 신 전 총리는 당초 이를 ‘신경제정책’이라 이름 붙이려 했으나 저지당했다. 안정화 조치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정치적 손해 때문에 망설이는 박정희 대통령 본인은 물론, 전임 부총리 남덕우로 상징되는 경제부처 내 성장파들과 겪어야 했던 끊임없는 충돌과 갈등 얘기가 이어진다. 이 안정화 조치는 10ㆍ26 이후 본격화된다.
역시나 흥미로운 건 정치 얘기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직후 신 전 총리는 권총을 차고 있던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몰아부쳐 박 대통령 시신 확인, 김재규 체포, 제주도를 제외한 비상계엄 선포 등의 조치를 주도했다. 신 전 총리의 의도는 ‘부분 계엄선포’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전국계엄은 내각 전권이 계엄사령관에게 넘어간다. 군부를 제 손으로 불러들이는 꼴이다. 부분 계엄을 택한 것은 최규하 국무총리 이하 내각이 과도기를 책임지고 관리한 뒤 물러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신군부의 권력욕망에 마지막까지 저항한 신현확
그러나 일은 그리 풀리지 않았다. 최 총리는 은근히 욕심을 냈다. 김영삼ㆍ김대중ㆍ김종필 같은 정치인은 저마다 뛰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위시한 신군부도 야욕을 드러냈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신군부였다. 신 전 총리는 ‘신군부에 빌미를 줘서 안 된다’는 명분으로 정치인들에게 시위 자제를 간곡히 요청했으나 먹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신 전 총리가 딴 생각을 한다, 신 전 총리를 넘어서야 대권을 쥘 수 있다는 얘기들이 요란했다. 그 덕에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 모인 시위대는 전 보안사령관과 함께 신 전 총리 인형도 불태운다.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다.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는 원래 최규하 전 대통령보다 신 전 총리를 선호했다. 외교부 출신으로 뜨뜻미지근한 최 전 대통령보다 경제 관료 출신으로 업무장악력이 있는 신 전 총리가 더 낫다고 여긴 것이다. 전두환ㆍ노태우가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이 1979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에 선출된 후인 80년 1~2월에 신 전 총리를 찾아와 대통령직을 직접 제안하기도 했다. 신 전 총리 본인도 신군부에게 권력을 주느니 차라리 자신이 직접 해볼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도기 관리 이후 사퇴’ 원칙을 고수키로 마음먹었다.
주영복 당시 국방장관이 신 총리와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전두환의 꼭두각시”라 불렀다는 최근 언론보도에 대해 신 이사장은 “신군부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요구를 5월 16일, 17일 이틀간 격렬하게 반대한 유일한 인물이었고, 결국 실패하자 곧장 사표를 던졌다”고 반박했다. 신군부와 대척점에 있었으며 이 때문에 전두환 정권과는 내내 불편한 관계였다는 주장이다.
6ㆍ29선언, 3당합당…모두 신현확 아이디어
‘박철언 역할론’을 부인하는 부분도 흥미롭다. 가령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 6ㆍ29선언은 노태우 당시 민정당 총재가 신 전 총리의 조언을 받아들인 결과다. 노태우 정권 당시 내각제를 전제로 한 3당 합당 또한 신 전 총리의 아이디어였다. 3김 경쟁체제가 정치불안의 화근이니 내각제를 해서 총리를 하라고 김종필 공화당 총재를 설득했다. 김영삼 측과 합의는 신 이사장과 김현철이라는, 양가 아들들을 메신저 삼아 이뤄냈다.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의 김영삼 공동대표를 ‘민자당 대통령’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다음 정권은 문민정부여야 한다는 ‘문민정부 순리론’을 만들어낸 이도 신 전 총리다. 신 이사장은 김영삼 대통령 당선 뒤 김현철을 만났을 때 5년 동안 해외 나가 있으라고 권했다는 비화도 털어놨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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