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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8할은] 전인권 “동화가 창작의 밑거름”

입력
2017.09.0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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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 ‘걱정말아요 그대’ 등 전인권의 히트곡엔 희망이 가득하다. 동화처럼 순수하게. 신상순 선임기자
‘행진’, ‘걱정말아요 그대’ 등 전인권의 히트곡엔 희망이 가득하다. 동화처럼 순수하게. 신상순 선임기자

※누구에게나 삶을 바꾸는 순간이 있습니다. 유명 문화계 인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들의 인생에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남긴 작품 또는 예술인을 소개합니다.

어려서도 호기심이 많았어. 북악산에 올라 무턱대고 버찌(벚나무 열매)랑 뽀루수(보리수 열매)를 따 먹었으니까. 약수터도 이곳 저곳 찾아 다녔지. 하도 자주 가 지금도 그 약수터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농담이 아냐. 국민학생 때도 집에 잘 안 붙어 있었거든. 공부하라고 하면 30분 마다 화장실 간다고 나갔지.

놀기도 많이 놀았는데, 책도 많이 봤어. 한 번 꽂히면 밤을 새웠지. 국민학교 3~5학년 땐 우리 동네에 있는 특이한 책은 다 봤던 것 같아. 물론 두꺼운 책은 말고. ‘삼총사’, ‘철가면’, 안데르센 동화집... ‘소공녀’를 특히 좋아했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돈 문제로 사감 선생에게 핍박을 받는 소녀와 반전들. 몇 번을 읽고 또 읽었지.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 생각해보니 소녀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은 모습에 빠졌던 것 같아. 돈이 없다고 다락방으로 쫓겨난 뒤 지칠 때면 연회장을 떠올리잖아. 허무맹랑한 상상이지. 그렇게라도 절망에서 무너지지 않으려 하는 거고. 희망을 품고 산다는 것, 참 어려운 일이잖아.

많은 사람이 그렇겠지만, 희망이란 말이 가장 좋아. 내가 부족한 게 많아 그런 걸까. 난 ‘흙수저’도 못 됐어. 워낙 가난했거든. 지붕 없는 집에서 이틀 정도 비를 맞은 적도 있어. 추운 겨울이었지. 두꺼운 이불을 먼저 덮고 그 위에 비닐을 둘러 잤어. 어찌나 고생스러웠는지 아직도 잊히지 않아. 어머니가 시장에서 행상을 해 생계를 꾸렸는데, 일찍 돌아가셨거든. 고생 많이 하셨어. 아버지는 한학자셨지. 공부만 하시던 분이라 돈벌이 생각은 안 하셨거든.

(서울) 삼청동에서 살았어. 잘 사는 동네 아니냐고? 요즘 일이지. 어려선 ‘인디언 부락’이 있었어. 주민들이 군부대 천막을 구해와서 임시로 만든 기둥에 매 30여 가구가 모여 살았거든. 인디언들이 사는 곳 같다고 해서 인디언 부락이라고 불렸지. 구청에서 철거하려 오면, 돌을 던져 버텼어. 다들 집이 없으니까 절박했던 거야. 다 국민학생 때 본 일들이야.

아까 말한 ‘소공녀’ 있지? 그 책도 빌려서 읽었어. 아는 누나였지. 그렇게 읽은 동화 속 희망적인 메시지들에 힘을 얻은 것 같아.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창작의 밑거름이 됐어. 내 노래에 희망적인 곡들이 많아. ‘행진’부터 ‘걱정 말아요 그대’까지. ‘걷고 걷고’란 노래 알지? 노래처럼 힘들어도 계속 걸어갈 수 밖에 없는 게 삶이고, 그렇게 걷다 보면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닐까.

희망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산전수전을 겪은 내가 여태까지 버텼다고 생각해. 나쁜 길도 많이 갔지만 길을 잃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고. 언젠가는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란 희망 말이야. 인생은 장편이야. 단편이 아니지. 당장 눈 앞에 놓인 일로 지나치게 많은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 더욱 희망을 얘기해야 하는 이유지.

내 곡들이 동화의 유산이란 게 낯설지? 음악적 스타일이 거친 건 표현일 뿐이야. 록 음악엔 소위 ‘꼬장’도 있고 반항적인 이미지들이 가득하지. 정작 오래 사랑 받는 곡들을 봐. 굉장히 교육적인 메시지들이 담겨 있어. 노래 ‘라이크 어 롤링 스톤’이 대표적이잖아. ‘네가 그렇게 믿어왔던 물질만능주의가 부질 없다’는 걸 지혜롭게 알려주잖아. (미국 포크 가수)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도 노래에 지혜가 담겨서라고 생각해.

힘들었을 때 희망적인 노래들이 찾아왔던 것 같아. ‘걱정말아요 그대’도 아내와 헤어진 뒤 우울증에 빠졌을 때 나를 찾기 위해 만든 노래였지.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잊어버렸죠’란 대목이 있잖아. 새로운 꿈을 꾸며 씩씩하게 일어서길 바랐지.

지난해 연말 혼란스러웠던 시국에 영감이 떠오른 곡도 비슷해. ‘당신은 잘 몰라요. 당신이 얼마나 강하고 귀한 사람인지. 언젠가부터 홀로 외로운 의자에서 일어나 비바람에 맞서 바다에 우뚝 선 당신...’이란 가사를 썼어. 곡 제목은 ‘축하해요’. 많은 사람이 절망에 빠져 힘들어 할 때 위로를 주고 싶어 만든 노래야. 녹음도 했어.

사람들이 나보고 가사를 잘 쓴다고 하네. 리듬감이 중요하지. 어려서 책을 많이 읽은 게 도움이 된 것 같아. 이걸 말해도 되려나. 재미있었던 건 사람들이 나보고 ‘귀티 난다’ 때론 ‘지적이다’란 말도 해줬어. 믿거나 말거나, 하하하.

박민규의 소설 ‘카스테라’를 재미있게 읽었어. 정말 통쾌했거든. 요즘엔 책이 잘 안 읽혀 아쉬워. 언젠가부터 난독증이 생겼어. 시간이 많이 지났네. 지난 4일, 생일이었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축하 메시지들이 많이 왔어. 참 고맙더라고, 다들.

난 욕심이 많아. 생일도 양력, 음력 다 챙겨. 집에 연습실도 차렸어. 다시 한번 해보려고. 4년 동안 공연 연습도 많이 했어. 오후 8시에 자고 오전 3시에 일어나 연습했지. 나이라는 게 먹어보니 별 것 아니더라고.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나이에 맞는 멋이 들어간 멜로디를 찾고 소리를 입히면 되는 거니까. 최선을 다해 볼게. 시련들을 이겨냈더니 이젠 무엇이든 재미있고, 쉽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 지 모르겠는 대목이지만.

목표는 세계로 나가는 일이야. 한 번 부딪쳐 보는 거지. 내 음악이 뒤떨어진다는 소릴 들으면 기분은 나쁘겠지만 말이야, 하하하.

<가수 전인권의 구술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정리=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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