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또 다른 공정경제 정책을 내놨다. 대기업이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하청 관계 등으로 엮인 중소기업의 독보적 기술 등을 가로채는 고질적 ‘기술 약탈’을 뿌리 뽑기 위한 대책이다. 공정위가 8일 당정협의를 거쳐 발표한 ‘대ㆍ중소기업 간 상생협력을 위한 기술 유용행위 근절대책’은 공정위 내에 기술유용사건 전담조직을 구성하고, 선제적 직권조사를 할 수 있도록 법체계를 개편한다는 게 골자다. 기술을 약탈한 원청사업자 등에 대해서는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고, 손해배상 규모와 조건도 크게 강화키로 했다.
기술 약탈은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고질적 ‘갑질’ 중 하나다. 대개 원ㆍ하청이나 사업 협력 관계에서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정보를 파악한 뒤, 보상도 없이 가로채는 식이다. 대기업이 빼돌린 중소기업 기술정보를 다른 업체로 유출해 제품 공급을 이원화한 뒤, 원래의 기술 개발업체와 거래를 중단하는 경우도 많다. 기술 대신 원가정보를 받아 제품 공급단가를 하청업체가 ‘죽지 않을 정도’까지 낮추는 근거로 쓰기도 한다. 기술뿐 아니라 하청업체의 사업 네트워크까지 가로채는 일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기술 약탈을 방치하면 산업생태계에서 도전적 신생기업이 고사할 수밖에 없다. 최근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세계 최초 기술이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한 가상현실(VR) 서비스 기술이 사실은 비즈니스협력을 추진했던 신생 벤처기업의 특허를 침해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벌어졌다. 제기된 혐의가 사실이고, 앞으로도 정당한 보상이 돌아갈 길이 없다면 그 벤처기업은 제대로 생존해 나갈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신생 기업의 싹을 자르는 일이 방치되면 궁극적으로는 대기업도 공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기술 탈취를 단순한 기업윤리를 넘어 심각한 범죄로 취급해야 할 이유다.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는 당정협의에서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조사대상 8,219개 기업 중 7.8%인 644개 기업이 기술 탈취를 겪었고, 피해금액도 1조원을 넘었다”고 밝혔다. 대개의 경우, 중소기업들이 거래 단절 등을 우려해 피해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피해는 훨씬 클 것이다. 공정위는 이번 대책에 맞춘 조직ㆍ제도 정비를 거쳐 내년에 기계ㆍ자동차 업종에서 시작해 업종별 기술 탈취에 대한 집중감시 및 선제적 직권조사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이번 대책이 기술유용으로 인한 기대이익보다 위법행위의 제재에 따른 손해가 더 크다는 점을 갑질 기업들이 똑똑히 깨닫도록 강력하고 흔들림 없이 시행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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