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며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지만 실은 국제적 기준에 뒤떨어지는, 한국만의 후진적 인식과 관행이 아직 상당하다. 결사의 자유나 정당가입의 자유 등과 같은 기본권 중에서도 기본이라고 할 정치권(political rights)의 훼손이 대표적인 예다.
결사의 자유라고 하는 현대사회 시민기본권의 원형적 원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체계적으로 침해되면서도 마치 당연한 것으로 수용되고 있다. 생각해 보자. 일상에서 노조니, 정당이니, 하면 당장 뭔가 음험하거나 위험한 느낌부터 들지 않나? 이러한 상황이 과연 정상적인가?
과거 한국 권위주의 체제의 지배자들은 일체의 결사체를 철저하게 억압하거나, 정부의 입맛대로 포섭하려고 했다. 구시대의 ‘공무원 나으리’들은 협회와 같은 민간의 조직체들을 수하에 두며 마음대로 조종하고 부렸다. 심지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호라고 하는 명시적 명분 하에 실질적인 자유민주주의의 기본권을 합법을 가장해 짓밟았다.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과거로부터의 ‘관계의 적폐’와 ‘인식의 적폐’는 여전히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잔존해 있다. 사회학자 미셸 푸코가 강조했듯, 현대성의 ‘기율권력’이 시민들의 내면에 스며들어 스스로를 ‘시민’이 아니라 ‘신민’이 되도록, 자율적인 주체(sujet)가 복종하는 신민(sujet)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즉 ‘알아서 기도록‘ 만든다.
촛불은 승리했지만 촛불정신이 지향하는 새로운 통치성은 아직 우리에게 체화되지 못했다. 그 동안의 자유민주주의를 가장한 유사전체주의(quasi-totalitarianism)의 틀에서 벗어나, 참된 시민적 자유와 권리가 향유되는 다원주의적 리버럴 데모크라시(liberal democracy)로의 전환은 계속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촛불정신을 따른다면 정부도, 눈치보지 않고 스스로 결사하며 진정한 공공선을 향해 주체적으로 행동해 갈 수 있도록 시민들의 의지와 결단을 장려해 가야 한다.
엊그제 국제노동기구(ILO)의 가이 라이더 사무총장이 한국을 다녀가면서 언론에 회자됐듯, 한국은 여전히 ILO의 핵심협약 중 결사의 자유에 관한 규정을 비준하지 않았다. 해당 협약의 비준은 단순히 현재의 노동계에게 정치적 힘을 실어주느냐 마느냐 따위의 협소한 흥정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적 노사관계의 기초적인 게임의 룰을 국제수준으로 끌어 올림과 동시에 그 기초인 법치(rule of law)의 원리를 공고히 재확립함을 뜻한다. 나아가 그 동안 그것을 빼앗겨 왔는지도 모르고 지내온 국민의 정치적 시민권을 전면적으로 회복시키는 긴 여정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궁극에는 포스트 캔들(post-candle) 국가에서의 새로운 통치성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막론하고 일하는 이들 모두가 당연히 향유해야 할 기초적 ‘권리의 양탄자’를 새로 까는 일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노동조합을 만들 때 관에 설립신고를 하고 필증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든지, 노조원이 되려면 특정 기업의 재직자여야 한다든지, 청년들을 위한 노동조합의 조합원은 40세가 넘지 않은 청년이어야 한다든지 하는 식의 권리제약적 관행을 당연시하는 인식과 이별해야 한다.
성역 없는 결사의 자유를 향유하기 위한, 국가의 통치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국가와의 협치의 파트너로 수평적으로 당당히 서는, 그리하여 자치의 주체로 자신을 인식하는 진정한 시민성을 갖춘 이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사회계약을 체결해야 한다. 이는 비단 노조원이 아니라 사회구성원들 모두가 나서서 도모해야 하며, ILO협약의 비준은 그러한 질적 사회전환의 상징적 계기로 기능할 수 있다.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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