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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종호의 판사의 길] 법의 정신 : 책임과 사랑

입력
2017.08.31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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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의 등장 이후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은 생활 각 분야에 파고 들어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듯 최근에는 사법 시스템에도 인공지능 기술이 도입되면서 일각에서는 ‘AI 법조인’의 탄생이 머지않았다는 성급한 관측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정말 가까운 미래에 인공지능이 법관을 대신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

Y는 X로부터 1,000만 원을 빌렸다. 그런데 약속한 기일이 되었음에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친구인 X에게 500만 원밖에 없으니 이것만 받고 나머지는 탕감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X는 Y의 부탁을 거절하며 약속한 대로 이행할 것을 종용하다가 결국 소송을 제기했다. 이 경우, 판사는 ‘원칙적으로’ Y로 하여금 X에게 약속한 대로 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선고하게 된다. 이는 당사자가 약속한 것이고, 실정법의 내용도 이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실정법을 지배하는 정신(또는 덕목)을 도출할 수 있는데, 약속이 만들어 낸 신뢰에 대한 ‘책임’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책임을 부과할 수 있는 요건사실에 따라서만 재판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에게 재판을 맡겨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재판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법 규정이 모든 상황을 규정할 수 없으므로 사건에 따라서는 단순히 몇몇 법 조항에 기대어 결론을 단호하게 내리는 것에 대해 마음의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사정들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위 사건에서 Y가 그 동안 X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많은 도움을 베풀어온 경우, 이러한 저간의 사정들이 무시된 채 판결이 선고된다면 Y는 친구 사이의 우정에 대해 회의하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법과 재판의 이념에 관해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재판의 두 가지 이념은 ‘진실 발견’과 ‘절차 보장’이고, 절차 보장의 목적은 설득을 통한 승복을 이루기 위함이다. 절차를 보장하지 않은 채 단순히 기계적 법 적용으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당사자의 승복을 기대하기가 어렵고, 이는 재판절차, 나아가서는 사법에 대한 불신을 초래한다. 따라서 재판이 승복을 얻기 위해서는 실정법에 따른 결론을 주저하게 만드는 사정들에 대한 숙고가 행해져야 한다. 결론이야 책임의 법에 따라 기계적으로 도출한다고 하더라도, 최종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호소와 경청을 통한 숙고라는 ‘인간의 얼굴’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숙고 과정의 하나가 ‘조정 절차’이다. 조정 절차는 실정법의 덕목인 책임의 정신을 한발 뒤로 물러서게 할 여지를 제공하는데, 그 전제는 다름 아닌 ‘양보’이다. 위 사건의 조정 절차에서 실정법상의 원칙과 다른 결론이 도출되기 위해서는 X의 ‘양보’가 필수이고, 이는 숙고 과정인 조정 절차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실정법상 당사자는 양보할 의무가 없고, 판사도 양보를 강제할 수가 없다. 자발성을 바탕으로 하는 양보는 강제성이 동원되는 실정법으로는 규율할 수 없는 덕목으로, 실정법과는 다른 차원의 ‘법’의 영역에서 도출된다. 이러한 차원의 법을 실정법과 비교하기 위해 ‘법을 넘는 법’이라고 하며, 자연법과 신법(神法)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정법과 법을 넘는 법은 모두 ‘법’으로서 사회를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법이 ‘관계의 준칙’으로서 사회를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속에 스며들어 있는 ‘관계의 덕목’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실정법을 지배하고 있는 덕목은 책임이고, 이는 인간관계의 기본이 되는 덕목이다. 그런데 앞서 본 바와 같이 책임을 덕목으로 하는 실정법만으로는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인간다운 사회를 위해서는 실정법상의 덕목 외에 법을 넘는 법의 덕목이 필요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후자가 더 중요한 덕목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한 덕목으로는 앞의 사례에서 본 양보에 더해 정직, 배려, 존중, 봉사, 관용, 용서, 희생, 자비, 박애, 우정, 효, 충성, 복종 등을 들 수 있다. 이 덕목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하면 결국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효’는 부모에 대한 사랑, ‘우정’은 친구에 대한 사랑, ‘충성과 복종’은 국가와 권위에 대한 사랑, ‘정직, 배려, 존중, 봉사, 양보, 관용, 용서, 희생, 자비, 박애’ 등은 이웃과 동포와 인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사랑이 사라져 간다면 인간 사회는 사막처럼 황폐해질 것이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비쩍 말라갈 것이다.

결국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법의 덕목은 ‘책임’과 ‘사랑’이다. 책임은 행위의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엄중한 약속인 반면 사랑은 여백을 허용하는 인간 존중의 정신이다. 사랑이 결여된 책임은 공허하고, 책임이 동반되지 않은 사랑은 맹목이다. 책임과 사랑의 정신이 조화롭게 발휘되는 사회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사회 아닐까? 이러한 사회가 속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천종호 부산가정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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