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빛나예술학교 조환진 대표
사라져가는 돌담 보전 위해
수강생 교육·교본 제작에 힘써
“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이 있죠. 근데 제주의 돌은 진짜 보물입니다.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30일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에 위치한 돌빛나예술학교에서 만난 조환진(44) 대표는 제주돌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표현했다. 그는 평생을 돌챙이(석공의 제주어)로 살아온 아버지 조창옥(95) 옹의 뒤를 이어 제주돌담의 전승·보전에 나서고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돌로 창고와 집을 짓고 돌담을 쌓는 모습을 보며 커 왔다. 하지만 처음부터 돌챙이를 평생의 직업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조 대표가 처음 제주돌담에 매력을 느낀 것은 대학교 2학년 때 강원 정선군을 여행하면서부터다. “청량리역에서 정선행 기차를 타고 가는데 창밖에 돌담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그동안 그저 돌덩이로만 봤던 제주돌담들이 보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죠.”
제주대 미술과를 다녔던 그는 여행을 다녀온 후 돌담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사진동아리활동을 하면서 돌담을 앵글에 담기 시작했다. 그와 제주돌과의 인연은 첫 직장으로 선택한 분재예술원인 생각하는 정원에서도 이어졌다. 그곳에서 그는 생각하는 정원의 성범영 원장을 도와 3년간 돌담을 쌓는 일을 도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돌은 관심의 대상일 뿐 직업은 아니었다.
조경업으로 직업을 바꾼 조 대표는 서귀포에 위치한 김영갑 갤러리를 찾아가 고 김영갑 작가로부터 틈틈이 사진을 다시 배웠다. 그러나 2003년 결혼과 함께 사진작가로의 길을 포기했다.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는 사진작가는 힘들다는 스승 김 작가의 조언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돌챙이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2005년부터 3년간 어버지의 도움을 받아 직접 자신의 돌집을 완성한 후부터다. 제주의 특이한 집으로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된 이후 그에게 돌집과 돌담 쌓기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결국 본업인 조경업은 접고 본격적인 돌챙이가 됐다.
그는 돌을 만지면서 전통 제주돌담에 대한 애정은 더욱 커졌다. 시멘트를 덕지덕지 바르거나, 대충 쌓아올린 돌담을 보면 가슴이 아팠다. 다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린 전통 제주돌담은 보기만 해도 안정적이고 편안했지만, ‘가짜’ 돌담들은 쳐다보는 것조차 불안하고 불편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제주 어디를 가나 지천인 것이 돌담이었다. 밭이나 집이나 무덤이나 다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또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돌집, 돌로 만든 창고, ‘똥돼지’를 키우던 돌로 만든 통시(제주의 옛 화장실) 등 돌은 제주사람들의 삶의 일부였다. 그러나 제주돌로 만든 유산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 사라져 가고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게 제주밭담이다. 제주밭담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세계농업유산으로 지정됐다.
조 대표는 소중한 제주돌담의 가치를 지키고 전승하기 위해 2015년 돌빛나예술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지자체와 기관들로부터 위탁받아 ‘돌담학교 프로그램’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수강생들에게 돌담 쌓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돌담 쌓기 작업을 하면 하루에 못해도 15만∼25만원의 수입이 생기지만, 돌담을 보존하기 위해 돌담학교를 선택한 것이다.
그는 또 현재 초보자도 쉽게 돌담을 쌓을 수 있도록 하는 ‘돌담교본’을 만들고 있다.
조 대표는 “내가 돌챙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세 명의 스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범영 원장과 고 김영갑 작가, 그리고 아버지”라며 “이 분들로부터 제주돌의 가치와 소중함을 배웠고, 이제는 직접 돌을 만지면서 더 깊게 알아 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돌을 그냥 보면 돌이지만 제주돌은 그 가치가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제주사람들부터 밭담 등 제주돌 유산에 대한 애착을 갖고 함께 지켜 나갔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제주=글·사진 김영헌 기자 taml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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