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빌리의 노래
제임스 밴스 지음ㆍ김보람 옮김
흐름출판 발행ㆍ428쪽ㆍ1만4,800원
영화 ‘포레스트 검프’ 같은 느낌일지 모르겠다.
해병대원으로 4년간 복무했다. 부시 정권 때 말 많은 이라크전에도 나갔다. 귀국 뒤 학살이니 뭐니 이라크전을 비판하는 대학생들을 보고 애송이라며 분노한다. 버락 오바마도 불편하다. 중후한 목소리, 매력적인 화법으로 관용과 통합의 가치를 역설한 오바마다. 하지만 “명확하고 완벽하게 표준 발음을 구사하는 오바마의 억양은 그저 생경하고 그의 스펙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화려”하게 느껴질 뿐이다. 문제는 ‘피부색’이 아니라 ‘거리감’이다.
저자 제임스 밴스는 그 자신이 남부 백인 하층 노동자 계급 출신이다. 그럼에도 오하이오주립대, 예일대 로스쿨을 거쳐 변호사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자다. ‘힐빌리의 노래’는 이 성취 과정을 그린 자전적 기록이자, 레드넥(Rednecks)ㆍ화이트 트래시(White Trash) 혹은 ‘힐빌리(Hillbillyㆍ산골 촌뜨기)’라 조롱당하는 하층 백인 노동자 계급의 생활상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이자 르포 문학이기도 하다.
가장 큰 강점은 ‘정치적 올바름’을 의식한 자기검열에서 벗어난 정직한 서술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대해 ‘보수주의 프로파간다 아니냐’고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회구조적 책임을 따져 묻길 좋아하는 진보들에겐 다소 불편할 책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소외와 가난, 가정해체와 체념의 문화를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저자가 이 책을 쓰고, 또 미국에서 화제가 된 이유다.
저자의 고향은 캔터키 주 남동부 탄광촌에 위치한, 인구 6,000명 정도의 잭슨이다. ‘분열하는 제국’(글항아리)의 저자 콜린 우다드의 분류에 따르면, 북아일랜드ㆍ스코틀랜드 이민자의 후손들이 사는 이 지역은 ‘타이드 워터’ ‘딥 사우스’ 지역과 함께 ‘꼴통 보수의 3대 아성’으로 꼽히는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지역에 속한다.
이 동네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이렇다. 어린 소녀가 동네 노인에게 강간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재판을 앞둔 어느 날, 그 노인은 등에 총알 16발이 꽂힌 채 호숫가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사건을 적당히 덮어버렸다. 신문엔 ‘폭행치사 추정’이라는 단신이 실리곤 끝이었다. 가난과 무기력, 그리고 약에 찌든 이들이 모인 힐빌리의 세계란 무시무시한 폭력, 그칠 줄 모르는 분노, 끔찍한 보복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그런 세계다.
이런 힐빌리의 세계를, 외부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가령 어느 진보 싱크탱크는 2012년 힐빌리가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비해 지나치게 긴 노동시간에 시달린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밴스는 이렇게 써뒀다. “그 보고서가 유일하게 증명해낸 사실이란 많은 사람이 자신의 근로시간을 부풀려서 말한다는 것이다.” 힐빌리는 일하지 않는다. 옆집 여자아이를 임신시킨 비상사태 때는 어쩔 수 없이 일하는데, 그마저도 약에 취하거나 1시간에 30분은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방식으로 일한다. 그러다 잘리면 회사가 갑갑해서 때려치웠다고 말한다. 이후 새 일을 적극적으로 찾지 않으면서 “오바마가 탄광을 폐쇄했기 때문이라느니, 중국인들이 일자리를 죄다 차지했기 때문이라느니 하는 이유”를 댄다.
기독교 원리주의 신자가 많다는 의미에서 ‘바이블(Bible)벨트’라 불린다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다. 독실한 교인들은 더 체계적으로 살지 않을까. “우리는 실제로 가는 것보다 더 자주 교회에 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여론조사 결과 교회 출석률보다 실질적 교회 출석률은 더 낮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원래 텅 빈 사람들일수록 뭔가 있어 보이기 위해 요란한 장식을 갖추기 마련인데, 성실한 신자 코스프레는 거기에 딱 알맞은 장치일 뿐이다. 그것 빼곤 딱히 입을 갑옷이 없어서다.
저자는 이렇게 힐빌리의 모든 주장을 일종의 ‘인지부조화’이자 ‘문화적 기만행위’라고 본다. 그러니까 손발 움직이기 싫으니 자기 입으로 자기 귀에다 대고 끊임없이 거짓말을 쏟아 붓는다는 얘기다.
이런 조건을 감안하면 저자 또한 “통계상 교도소에 들어가 있거나 네 번째 사생아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어야” 마땅하다. 실제 그럴 위기는 여러 차례 있었다. 아빠가 떠난 뒤 엄마는 약에 찌들어 살면서 쉴 새 없이 남자들을 갈아치웠다. 젖병에다 콜라를 채워 먹이질 않나, 마약 검사를 피하기 위해 아들 오줌을 받아다 소변검사에 대신 내는가 하면, 사소한 다툼 끝에 10살도 안된 아이를 차와 총으로 위협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저자가 부랑아가 될 운명을 벗어난 건 그나마 ‘할보’ ‘할모’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외할아버지 짐 밴스, 외할머니 보니 블랜턴 덕이다.
그 덕에 개천에서 난 용이 됐으니 이 모든 것이 해피엔딩인가. 힐빌리의 유령은 그리 쉽게 죽지 않는다.
“평생에 걸쳐 받아야 할 호의를 미리 다 써버리지 않도록 삶의 안전판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어릴 때도 먹을 음식이 없거나 자동차가 고장 났을 때 도움을 구하는 행동조차도 과하게 탐닉하면 안 되는 사치로 여겼다.”
“어린 시절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내게는 심신을 깎아먹는 자기 회의가 몸에 배었다. 나는 장애물을 극복해내는 자신을 축하하기보다는 다음 장애물에 다시 넘어지지 않을까 늘 걱정했었다.”
‘벽장 속 괴물’ 또한 늘 경계해야 한다. 그 괴물이란, 언제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를 격한 분노, 폭력 같은 것들이다. 그 뒤엔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우리 집안 사람들의 문제가 대를 거쳐 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로 인한 격렬한 자괴감이 몰려든다.
빌 게이츠가 이 책을 추천하고, ‘다빈치 코드’의 론 하워드 감독이 영화화하겠다고 나선 이유가 짐작된다. 주머니 속에다 총을 차고 성조기를 격렬하게 흔들어대는 힐빌리들은 실은 울고 있는 것이다. 태극기 물결도 아마 그럴 것이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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