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
오노 히로유키 지음ㆍ양지연 옮김
사계절 발행ㆍ352쪽ㆍ1만6,800원
“한나, 내 말 들려요? 먹구름을 헤치고 드러나는 저 찬란한 햇살을! 어둠을 벗어난 빛으로 욕심과 미움이 없는 세계로 나아갑시다. 위를 봐요, 한나! 인간의 영혼이 날개를 달고 치솟아 오르는 저 모습을!”
1940년 6월. 덩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연합군은 물러나고 나치군은 마지노선을 우회돌파해 프랑스를 장악했으며 아돌프 히틀러는 마침내 파리에 입성했다. 유럽대륙 장악의 꿈을 이룬 히틀러가 한참 기세등등 했을 그 때로부터 불과 넉 달 뒤인 10월. 미국에선 찰리 채플린이 연출과 주연을 겸한 영화 ‘위대한 독재자’가 개봉했다. 독재자 힌켈 캐릭터를 통해 히틀러를 마음껏 비웃어줬던 영화다. 이 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장면은 온 힘을 다해 평화를 호소하는, 무려 6분여에 달하는 채플린의 연설 장면이다.
이 장면은 열띤 찬반논란에 휩싸였다. “우파는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라고 공격하고, 좌파는 미온적인 감상주의라며 비판하고, 영화 비평가들은 캐릭터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개봉 전부터 우파는 괜히 히틀러를 조롱했다가 지나치게 자극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고, 좌파는 히틀러 같은 문제적 인간을 두고 낄낄 웃어대는 영화를 만든다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어쩔 수 없는 반응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중은 달랐다. ‘위대한 독재자’는 상영지역을 넓혀가며 흥행세를 불려갔고, 채플린과 히틀러의 콧수염을 비교해서 풍자하는 놀이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 뒤 “히틀러의 연설은 격감”한다. “1932년 선거 때 비행기를 타고 하루에 서너 곳을 방문하면서 연설하던 선동가”였는데 “1941년에 한 대중연설은 겨우 7회, 1942년에는 5회에 불과하며, 1943년에는 2회로 줄어든다.” 나치의 선전장관 파울 괴벨스의 끈질긴 대중 연설 요청에도 히틀러는 나서지 않았다. 채플린 영화가 히틀러를 저격해버린 셈이다.
혹시 히틀러는 ‘위대한 독재자’를 봤을까. 나치는 두 사람의 콧수염 비교는 물론, 채플린 영화 상영을 금지했다. 조바심 내고 있었다는 얘기다. 실제 1936년부터 채플린 관련 정보를 모두 수집하고 있었다. 나치의 ‘제국 필름 아카이브’ 가운데 ‘위대한 독재자’는 ‘희곡 캐릭터 선동영화’ 항목 제 15242번으로 남아 있다. “총통에 반항해 만들어진 최악의 작품”이란 평까지 달려 있다. 히틀러의 경호원 로흐스 미슈는 1940~41년쯤 히틀러가 채플린의 영화를 본 적 있다는 기록도 남겨뒀다. 기록 너머는 상상의 영역이다.
‘세기의 콧수염 대결’을 기록한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은 일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책이다. 일본채플린협회장을 지낸 오노 히로유키가 오타쿠 같은 기질로 메이킹필름, 자필메모, 뮌헨현대사연구소 등을 샅샅이 뒤졌다. ‘위대한 독재자’의 캐릭터, 연출, 대사, 장면 등이 어디서 어떻게 왜 변했는지 상세하게 밝혀뒀다.
비극적 코미디는 그 다음이다. 히틀러를 궤멸시킨, 6분여간 연설 장면은 미국에게도 부담이었다. 채플린은 평화를 해치는 애국주의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고 외치고 다녔다. 결국 1952년 미국은 입국 거부 형식으로 채플린을 추방해버린다. “나치에 이어 등장한 냉전과 매카시즘이라는 집단 히스테리도 범죄조작, 여론통제, 미디어를 이용한 선동이라는 측면에서 나치와 다를 게 없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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