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 32)에서 ‘자유케 하리라’의 정확한 표현은 ‘자유롭게 하리라’다. ‘자유하다’란 말이 없기 때문에 ‘자유하게’를 줄인 ‘자유케’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왜 성경에선 이처럼 문법적이지 않은 표현이 사용되었을까. 그건 성경의 번역 시점과 관련이 있다.
‘자유(自由)’는 근대 초 일본에서 ‘freedom’ ‘liberty’의 번역어로 채택한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세기 말경부터 이 말이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한영ᄌᆞ뎐(1897)에 ‘ᄌᆞ유(自由)ᄒᆞ다’란 낱말이 실려 있다는 점이다. ‘하다’가 ‘건강, 행복, 공부, 운동’ 등 상태와 동작을 나타내는 한자어 명사에 붙어 형용사나 동사를 만드는 것처럼, 그 당시에는 ‘자유’에도 ‘하다’를 붙여 썼던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란 번역은 이런 맥락에서 나오게 되었다.
당시 ‘자유’는 주로 개념어로 쓰이면서 일상 생활어의 영역으로 넘어오지 못한 듯하다. ‘자유’와 유사한 일상 생활어로는 ‘임의(任意)’란 말이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의’라는 기존 한자어가 ‘자유’의 확산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자유하다’란 말 또한 성경 번역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널리 확산되지는 못했다. 주목할 것은 일상어로서 ‘자유’의 쓰임이 확대되면서 ‘자유하다’를 대신해 ‘자유롭다’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임의’가 차지하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음’의 의미 영역을 ‘임의’와 ‘자유’가 나눠 갖게 되면서, ‘임의롭다’의 영역에서 ‘자유롭다’가 자신의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자유’의 쓰임이 확대되며 ‘자유롭다’의 쓰임 또한 확대되어 오늘에 이른다.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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