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사내벤처 C랩 ‘앱’ 개발
자사 스마트폰과 VR기기 이용
시각장애 1~6급 교정시력 향상
착용 땐 0.0~0.1서 0.8~0.9로
오큘러스 스토어에서 무료 다운
서울 강북구 수유동 한빛맹학교 교실에서 한 소녀가 시각장애인용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다. 마치 모니터와 하나가 된 듯 얼굴을 화면에 밀착한 소녀에게 삼성전자 사내 벤처육성프로그램 C랩의 하나인 릴루미노(Relúmĭno) 팀원이 가상현실(VR) 기기 ‘기어VR’을 건넸다. 기어VR을 착용한 소녀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졌다. “우와 대박, 너무 신기하다.”
잠시 뒤 조용히 교실에 들어온 어머니가 책상 맞은편에 앉았다. 릴루미노 팀원이 “앞에 누가 있는지 보여요?”라고 묻자 소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누군지 알 거 같아요. 엄만가.” 말없이 딸의 모습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눈가를 훔쳤다.
이 장면은 연출된 게 아니다. 최근 개발이 끝난 시각장애인용 응용소프트웨어(앱) 릴루미노의 현장 테스트 촬영 영상 중 일부다. 라틴어에서 따온 “빛을 되돌려준다”는 팀 이름처럼 릴루미노는 1년간의 연구 끝에 10만원대 장비로 시각장애인에게 빛을 선물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삼성전자는 C랩 과제 중 하나로 릴루미노 팀이 개발한 시각장애인 VR기기 전용 앱 릴루미노를 VR업체 오큘러스가 운영하는 오큘러스 스토어를 통해 공개했다고 20일 밝혔다.
이 앱은 빛을 지각하지 못하는 '전맹'을 제외한 1~6급 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할 수 있다. 삼성전자 갤럭시S7 이후 출시된 스마트폰으로 내려받아 기어VR로 실행하면 왜곡되거나 뿌옇게 보이던 사물을 보다 또렷하게 볼 수 있게 돕는다.
기어VR에 장착한 스마트폰 후면 카메라에 비친 이미지를 윤곽선 강조와 색 밝기 조정, 색 반전, 색상필터 기능 등으로 재조정하는 원리다. 섬 모양으로 일부 시야만 왜곡된 ‘암점’이나 시야가 줄어든 ‘터널시야’를 가진 이들을 위해 잘 보이는 영역으로 사물을 이동시키거나 독서에 편하도록 이미지를 변환하기도 한다. 중앙대 안과 문남주 교수팀이 올해 1~7월 진행한 임상시험에서는 최대 교정시력 0.0~0.1이 릴루미노 착용시 0.8~0.9로 향상된다는 결과를 얻었다.
시각장애 2급인 한빛맹학교 김찬홍 교사는 “학생 8명의 테스트가 끝난 뒤 나도 궁금해서 써봤는데, 수백만원 짜리 고가 장비 부럽지 않게 잘 보였다”고 소감을 밝혔다.
릴루미노 앱은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다. 한국어와 영어로 제작돼 국내는 물론 전 세계의 시각장애인들이 사용 가능하다. 영어 버전은 지난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에서 쏟아진 전 세계적인 관심에 대한 화답이다.
릴루미노를 이끈 조정훈(44) 팀장은 “주로 즐거움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VR이 누군가에는 등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2단계로 가볍고 작은 안경 형태 제품 개발에 착수하겠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2012년 도입한 C랩의 과제 수행 기간은 최대 1년이지만 릴루미노에 대해서는 특별히 1년을 더 주기로 했다. 더욱 나은 세상을 위한 기술의 가치를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재일 삼성전자 창의개발센터 상무는 “릴루미노는 세계 2억4,000만명에 이르는 시각장애인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착한 기술’이라 후속 과제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김창훈 기자 ch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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