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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철의 프레임] 개인의 질투, 집단의 질투

입력
2017.08.17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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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마르는 결국 FC 바르셀로나를 떠났다. 더 정확히는 메시를 떠났다. 공격수로서 메시와 한 팀에서 뛴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축복이자 동시에 엄청난 심리적 위협이다. 그와 함께 뛰는 것은 승리와 우승을 보장해주지만, 메시에게 독점되는 관심과 날마다 이루어지는 그와의 비교는 공격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질투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네이마르가 비록 이적료 신기록을 세우기는 했지만, 그가 택한 것은 돈이 주는 행복이 아니라 질투에서 벗어나는 행복이었던 것이다.

유사한 일이 미국 NBA에서도 벌어졌다.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전성기를 만들었던 세 명의 스타 중 카이리 어빙이라는 선수가 최근 트레이드를 요구했다. 르브론 제임스라는 농구 황제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한 특단의 선택이었다. 어빙에게 제임스는 네이마르에게 메시가 그랬듯 축복이자 위협이다. 그와 함께 뛰었기 때문에 우승과 명예를 얻었지만, 동시에 늘 그와 비교당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스타플레이어는 팀 내에서 축복이자 위협이다. 팀 전체의 성과와 인지도를 올려서 그 혜택이 모든 팀원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축복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그에게만 집중되는 관심, 그에게 우선적으로 부여되는 기회는 다른 팀원들에게 질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 스타를 향한 개인들의 질투는 자연스럽다. 심지어 네이마르나 어빙 같은 스타들조차도 메시나 제임스 같은 존재를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을 보면, 개인의 질투가 얼마나 인간적인 감정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질투가 개인을 넘어 집단에서 조직적으로 경험될 때 생긴다. 질투가 집단적 현상이 되어, 화합과 협동이라는 대의명분을 등에 업고 탁월한 소수를 은밀하게 그러나 조직적으로 괴롭힐 때, 질투는 개인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넘어 소수를 향한 다수의 갑질이 되기 쉽고, 종국에는 우리 모두를 해치는 자해 행위가 된다. 집단행동에 관한 많은 연구들은 탁월한 성취를 이뤄내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의 동료들로부터는 차가운 평가를 받는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밝혀왔다. 이들의 이직률이 높은 이유는 시장의 높은 수요와 자신의 강한 성취욕도 있지만, 이들이 조직 내에서 경험하는 때로는 은밀한, 그러나 때로는 노골적인 질투와 냉대라는 것이다.

집단의 질투가 파괴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쉬운 경우는 응집력이 강하고 성과가 균등하게 분배되는 조직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성취보다 화합을 중시하는 조직일수록 집단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소수의 스타플레이어들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다. 개인의 질투라는 비난을 잠재울 수 있는 최고의 무기가 ‘조직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가끔씩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방법들을 동원하면서까지 소수를 괴롭힐 수 있는 것도 조직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 사회의 역설적 고민이 있다. 우리 사회는 협동과 화합, 균등과 단합을 중시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이 장점이 양날의 칼이 되어, 평균을 깨는 소수의 탁월한 개인과 집단을 은밀한 방법으로 괴롭혀서, 결국 모두가 앞으로 한발 더 나아가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소아보다 대아를 중시해온 문화적 전통은 위기를 극복해내는 희생과 헌신의 DNA를 만들어냈지만, 평균을 깨는 소아를 위협으로 느끼는 집단적 질투를 만들어낸 것이다.

과학 저널 <사이언스>에 반사회적 처벌(Antisocial punishment)이라는 현상을 소개하는 논문이 실린 적이 있다. 반사회적 처벌이란 공동체를 위해서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을 오히려 벌주는 행위를 의미한다. 자기보다 훨씬 더 많이 공동체에 기여한 착한 사람을 왜 벌 주려 하는 걸까.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집단의 평균을 깨뜨리고 남들 모두를 바보로 만들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적당히 하면 되는데 유별나게 튀는 바람에 결국 우리가 바보가 되었다는 심리가 착한 일을 한 사람을 벌주는 행동을 유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논문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 이런 반사회적 처벌의 빈도가 높다.

반사회적 처벌은 은밀하게 일어난다. 착한 소수, 탁월한 소수의 평판에 살짝 생채기를 낸다. 누군가 그에 대해 물으면 의도적으로 적당히 침묵을 지키거나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지나치게 이기적이라는 평가도 빼놓지 않는다. 물론 그때마다 집단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중요 공직에 임명된 사람들에 대한 과거 동료들의 칭찬이 인색한 경우를 자주 본다. 탁월한 성과를 낸 과학자에 대한 동료들의 칭찬이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경우도 심심찮다. 몇몇 개인의 질투라면 자연스러운 것이겠으나, 이런 풍토가 조직 전체의 특징이라면, 더 나아가 우리 문화 전체의 특징이라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 탁월한 조직이란 집단의 단합이라는 대의명분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 조직이다. 집단적 질투가 집단의 화합이라는 옷을 입고 있지 않은지 우리를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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