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 가방 릴레이 진풍경... 공항보다 까다로운 입장
비가 온종일 쏟아지던 8월15일 광복절. 편의점으로 가 접이식 우산을 샀다. 집에 수두룩하게 쌓여 있는 긴 우산을 놔두고 접이식 우산을 따로 구입해야만 한 이유는 미국 팝스타 아리아나 그란데의 공연을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그란데의 공연장에 긴 우산은 반입 금지 품목이었다. 그란데 측이 안전을 위해 공연장 내 긴 우산 반입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영국 맨체스터 공연장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 후 그란데의 공연장 보안 검색이 강화된 탓이다.
그란데의 공연장 입장 요건은 공항보다 까다로웠다. 셀카봉을 비롯해 노트북, 페트병도 반입이 금지됐다. 가방도 함부로 들고 갈 수 없었다. 그란데의 공연장인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 입구에는 관객들이 속이 환하게 다 보이는 투명 가방을 들고 줄을 서 있는 기이한 풍경이 연출됐다. 가방 속에 든 물건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투명 가방 외 다른 가방을 들고 공연장에 입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또한 그란데 측의 요청이었다. 공연장에 들어가기 위해선 두 차례의 금속물 탐지 검사를 받아야 했다. 영국 공연장 폭탄 테러 후 국내 가수들의 공연장에도 금속 탐지대가 설치된 적은 있지만, 긴 우산과 가방까지 반입이 금지되기는 매우 이례적이다. 그란데의 공연장은 ‘요새’가 따로 없었다. 그란데의 내한 공연을 기획한 현대카드에 따르면 이날 공연장에는 보안과 진행을 담당하는 요원이 무려 600명이나 투입됐다. 미국 유명 록밴드 메탈리카가 지난 1월 같은 곳에서 연 공연에 투입된 인원(300명)보다 두 배나 많은 수치다.
흔들림 없는 가창력… 차세대 팝 음악 디바의 진가
그란데는 캐나다 가수 저스틴 비버와 함께 영ㆍ미 팝 음악계를 대표하는 아이돌이다. ‘핫’한 팝스타의 공연은 어떨까. 어떤 공연 보다 입장 절차는 까다로웠지만, 그란데의 무대는 빈틈이 없었다. ‘비 올라이트’로 공연의 문을 연 그란데는 23곡의 춤과 노래를 흔들림 없이 라이브로 소화해 차세대 팝 디바로서의 저력을 입증했다. 노래 ‘터치 잇’과 ‘리브 미 얼론’에서 쏟아낸 폭발력 있는 가창력은 절창이 따로 없었다. 그란데는 가녀린 외모와 달리 폭넓은 음역과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1990년대의 디바 머라이어 캐리를 연상시킨다는 평을 받아왔다.
그란데가 153㎝의 작은 체구에서 뿜어낸 믿기 어려운 강렬한 무대에 2만 여 관객은 뜨겁게 환호했다. 그란데의 히트곡 ‘뱅뱅’과 ‘프라블럼’이 나올 땐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흔들며 그의 노래에 환호하는 관객도 많았다. 그란데는 국내 10~20대에 인기가 많다. 지난해 방송된 Mnet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에서 전소미, 최유정 등 연습생들이 ‘뱅뱅’을 커버하는 등 국내 여러 방송에서 그의 음악이 소개되면서다.
그란데는 자신이 겪은 아픔을 무대에 펼쳐 놓기도 했다. 그란데가 ‘오버 더 레인보우’를 부를 때 무대 스크린에는 ‘검은 리본’이 떴다. 그란데의 트레이드마크인 토끼의 귀와 합성된 이미지였다. 영국 공연장 테러로 숨진 이들을 추모하는 뜻이 담겼다. 그란데는 테러 이후 공연에서 검은 리본 이미지를 띄워 관객과 슬픔을 나누고 있다. 그란데는 지난 2월부터 ‘데인저러스 우먼’을 주제로 월드 투어를 하고 있다. 테러 후 잠시 공연을 중단했던 그는 ”테러에 굴복하지 않겠다”며 무대를 이어오고 있다.
리허설 불참, 정서적 공감대 형성의 실패… 일방 통행의 후폭풍
그란데는 첫 내한 공연 운영에 미숙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란데는 공연 리허설을 하지 않아 ‘VIP 티켓’을 산 관객들의 원성을 샀다. 그란데의 미국 매니지먼트사가 현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그란데의 리허설과 공연을 연달아 볼 수 있는 패키지 티켓을 고가(65만 원)에 팔았는데, 그란데가 리허설을 하지 않아 VIP 티켓을 산 관객들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일본에 머물고 있던 그란데는 공연 세 시간 전인 이날 오후 5시에 입국했다. 시간 관리를 잘못해 팬들에 실망감을 준 건 톱스타로서 무책임한 처사다. 공연 사전 점검이 충분히 하지 않은 탓이었을까. 공연의 음향은 울렸고, 조명은 흔들렸다.
한국 관객과의 소통에도 아쉬움을 남겼다. 그란데는 첫 내한 공연이 이뤄진 날이 한국 관객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광복절이란 걸 모르는 눈치였다. 그란데는 공연에서 광복절에 대한 언급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폴 매카트니 등 해외 팝스타들이 내한 공연에 와서 흔히 하는 ‘태극기 퍼포먼스’도 그의 공연엔 없었다.
공연의 미덕을 가수와 관객의 정서적 교감에서 찾는다면, 그란데가 이날 보여준 무대 매너는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 공연하는 나라의 특성과 공연 날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 밴드 콜드플레이가 세월호 참사 3주기인 4월16일에 공연하며 세월호 희생자를 위해 묵념을 하는 등 한국 관객들과 적극적으로 교감한 터라 더욱 뒷말을 낳을 수 밖에 없었다.
한국 관객들은 그란데를 위해 그가 ‘문라이트’를 부를 때 곡에 맞춰 휴대폰으로 불빛을 내 공연장을 밝혔다. 그란데는 공연 직후 ‘문라이트’ 무대 영상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며 “서울 공연은 마법 같았다”며 “오늘 밤 관객들의 멋진 에너지에 감사하다”고 한국 관객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하지만 일부 관객은 여전히 아쉬움을 지우지 못했다. 공연 후 온라인엔 ‘그란데는 노래를 잘 했지만, 한국 팬들을 돈벌이 (수단) 같이 대했음. 따라서 ‘탈덕’함’(Gre*******) 등의 글까지 올라왔다. 반감은 거셌다. 관객과 정서적 교류의 중요성을 간과한 팝스타가 자처한 후폭풍이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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