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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칼럼] 진시황이 거대한 동상을 만든 까닭

입력
2017.08.14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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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사상 최초로 황하와 장강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렇게 통일되기 전 중국은 550여 년간 지속된 분열과 혼란 속에 각 나라는 살아남기 위해 그야말로 싸우고 또 싸웠다.

전쟁의 크기와 기간, 소요 비용이 늘어갔음은 당연한 귀결, 그 폐해와 살육 규모도 커져만 갔다. “땅을 차지한다며 전쟁을 하고는 사람을 죽여 온 들판을 가득 메우고, 성을 차지한다며 전쟁을 하고는 사람을 죽여 온 성에 가득하게 한다. 이는 땅에게 사람 고기를 받친 셈으로 그 죄는 죽음으로도 용서될 수 없다”(‘맹자’)는 절규는 그저 공허한 메아리였다. 급기야 학살한 인명을 십만 단위로 헤아리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전쟁의 광기가 일상화했기에 야기된 참극이었다.

강력한 통일 대제국을 건설했음에도 진시황이 허구한 날 잠 못한 이룬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 힘써 일군 대제국이 만대에 전해지도록 갖은 장치를 고안해냈건만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중원 곳곳에 병기가 산재했고 평민 중 상당수가 전투경험을 지니고 있었던 탓이었다. 워낙 오랜 기간 나뉘어 싸우다 보니 어느덧 무기와 병력이 일상에 그득하였다. 그러니 수틀리면 언제라도 들고 일어날 가능성이 삶터에 충만했다. 이것의 해소 여부에 따라 제국은 단명할 수도, 만세에 유전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진시황은 각지의 장정을 징집하여 만리장성 수축 현장으로 투입하였다. 변방 요충지와 수도를 최단거리로 잇는 직도(直道) 가설에도 적잖은 인력을 동원했다. 아방궁 건축에도 수많은 인력을 그러모았다. 한마디로 대규모 토목사업장에 ‘잠재적 병력’을 집적시켜놓고 이를 정부가 관리함으로써 있을 수 있는 무력 봉기를 막아보자는 심산이었다.

삶터에 퍼져있던 무기도 폐기했다. 당시 상황을 전하는 사마천의 증언에 의하면, 진시황은 천하의 병기를 수도로 거둬들인 후 이를 녹여 거대한 동상 12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동상의 무게는 개당 12만 근 또는 24만 근이었다. 대략 30톤 또는 60톤에 해당되는 무게다. 솔직히 그다지 거대한 규모라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하는 일화에 따르면,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동탁이 이 중 하나를 녹여 휘하 군사 2만 명을 무장시켰다고 한다. 이 셈법대로라면 동상 12개로 24만 명을 무장시킬 수 있다. 지금 세상에서 24만 명을 무장시키려면 얼마의 비용이 들까. 아니 그렇게 할 수 있는 국력을 지닌 나라가 과연 몇이나 될까.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적 허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무기를 폐기하고자 했던 진시황의 노력만큼은 가히 알 수 있다. 게다가 진시황만 이랬던 게 아니다. 위진 남북조를 통일한 수의 문제와 양제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400년 가까이 지속된 난리 통에 무기는 삶터에 산재케 됐고 백성들에겐 전투경험이 축적되어 있었다. 제국에 언제라도 균열을 가할 수 있는 결코 가볍지 않은 잠재적 불안 요소였다. 이에 그들은 진시황처럼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였다. 대운하 건설이 그것이다. 동상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고구려 정벌에 대대적으로 나섰다. 영토도 넓히고 병력과 무기를 통제 가능한 범위 내로 소진할 수도 있으니, 성공만 한다면 적어도 일석이조는 됐다.

이들과 유사한 일이 일본에서도 있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랜 분열기인 전국시대를 통일한 당사자였다. 조선 정벌은 상존하는 화력을 나라 밖으로 빼냄으로써 안정된 국정 운영을 구현코자 한 책략의 하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본격적으로 부상한 ‘정한론(征韓論)’의 이면에도 이런 책략이 도사리고 있었다. 다만 이런 ‘폭력으로 폭력을 제거’하는 방식은 하나같이 끝이 나빴다. 진과 수,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단명했고, 일제는 말 그대로 ‘폭망’했다. 단적으로 물리력이 삶터와 일상에 퍼지고 쌓이면 무슨 수를 쓰던 그 끝은 결국 파멸이고 만다는 점을 이들 역사는 분명하게 말해준다.

72년 전 우리는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했지만, 적어도 19세기 말부터 한반도를 둘러싸고 쌓여가기만 했던 물리력은 결국 6․25전쟁이란 참극으로 터져 나와 남북을 합쳐 약 200만 이상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이는 당시 남북한 인구의 10% 이상에 해당되는 수치고,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때보다 살상능력이 엄청나게 제고되었고, 압도적으로 고도화된 화력이 한반도와 일본, 중국 등지에 집적되어 있는 지금 전쟁이 또 일어난다면 과연 살상규모는 얼마나 될까.

광복절 아침을 72번째 맞이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미완의 광복을 맞이하고 있는 까닭이다. 1945년에 맞이한 광복은 정통성 있는 왕조를 복원했다는 뜻이 아니기에 그렇다. 그것은 자주적 국민이 독립된 국가를 건설케 됐다는 뜻이며, 이를 저해하는 제반 세력으로부터 해방됐다는 뜻이기에 그렇다. 무엇보다도 평화의 안정적 실현이 광복의 참다운 의미 중 하나이기에 더욱더 그러하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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