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의 확장을 고민해 온 유근택(52ㆍ성신여대 동양화과 교수) 작가가 한지 안으로 들어갔다. 한지를 늘어 놓고 행위 예술을 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림 그리는 종이는 작가가 붓을 놀리는 대로 가만히 있는 평면 공간이다. 유 작가는 한지를 변형해 이야기와 사건이 스미고 쌓이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17일부터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개인전 ‘어떤 산책’에서 한지 안에 들어 앉은 유 작가를 만날 수 있다.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한 것일까.
유 작가는 여섯 겹 장지를 물에 불린 뒤 녹을 제거할 때 쓰는 철솔로 마구 긁었다. 종이의 결이 일어나면서 두께와 깊이가 생겼다. 그는 “종이의 공간으로 내가 헤집고 들어가 개입하고 재료들에 말을 걸었다”고 표현했다. 종이가 마르기 전에 템페라와 호분(조개 껍데기를 빻아 만든 안료), 먹을 섞은 물감을 칠했다. 물감은 어떤 부분엔 동양화처럼 은근하게 스미고 어떤 부분엔 유화의 마티에르(질감)를 남기며 쌓였다. 한지 위에서 쉼 없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기법으로 그린 ‘방’과 ‘도서관’ 시리즈는 멀리서 한 번, 가까이서 다시 한 번 구석구석 들여다 봐야 하는 작품이다. “동양화가 운필(運筆)만으로 현대 감수성을 받아들이고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그래서 한지의 공간감과 정서를 어떻게 넓혀갈 수 있을지 질문을 던졌다. 평면을 지향하는 서양화 캔버스에선 불가능한 작업이다.”
유 작가는 이번에도 ‘일상’을 그렸다. 서울 성북동 자택에 걸린 모기장과 2015년 3개월 간 지낸 독일 베를린의 크로이츠베르그 도서관의 책장이 ‘방’과 ‘도서관’ 시리즈의 배경이다. 산수화처럼 풍경을 재현한 게 아니다. 단색조로 화폭이 거의 꽉 차게 그린 모기장과 책장엔 빨래, 옷걸이, 풍선, 사다리, 욕조 같은 서로 아무런 연관성 없는 오브제가 희미하게 겹쳐 보인다. 서사도, 원근법도 무시한 비이성적 공간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단조롭고 심심할 수 있지만, “흔하게 느끼는 삶의 순간순간의 소중함을 종이의 구조 안으로 밀어 넣었다”는 게 유 작가의 설명이다. 난해하다면 굳이 애쓸 필요 없다. ‘피상적’으로만 보아도 충분히 따뜻하고 충만한 그림이다.
그런데 왜 모기장과 빨래일까. “집에 모기가 많아 모기장을 치고 자면서 존재론을 고민했다. 하늘하늘 가벼운 모기장이 이쪽과 저쪽의 세계를 가를 수 있다는 것, 매단 부분을 풀거나 끊으면 툭 떨어져 형태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 흥미로웠다. 벗어 걸어 둔 빨래가 축 처진 모습에서는 시간이 축 처진 느낌과 입는 이의 영혼이 빠져 나간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 최ㆍ근작 37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9월 17일까지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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