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에 ‘군사행동’ 위협
남미 “과거 무력개입 벌써 잊었나”
베네수엘라 정정 혼란 사태에 ‘군사 개입’ 가능성을 경고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이 남미국가들 사이에서 거센 역풍을 일으키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 미국의 내정간섭 망령이 남아 있는 남미 지역에 반미 감정을 부추겨 베네수엘라 사태를 오히려 꼬이게 할 우려가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일(현지시간) 휴가지인 뉴저지주 베드민스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우리는 세계 곳곳에 군대가 있다. 베네수엘라를 위해 많은 옵션이 있고 필요할 경우 쓸 수 있는 군사옵션도 있다”며 무력개입을 배제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다만 어떤 군사행동을 사용할 것인지 등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아 구체적인 방안은 마련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트럼프의 언급은 즉각 마두로 정권에 반격 빌미를 제공했다. 호르헤 아레아사 베네수엘라 외무장관은 12일 마두로 대통령 명의의 성명을 통해 “트럼프가 무모한 협박으로 중남미를 갈등으로 몰아넣고 있다”며 “과거 100년 동안 베네수엘라에 취해진 가장 호전적 행위”라고 맹비난했다.
모처럼 마두로 정권의 철권통치에 맞서 한 목소리를 냈던 남미 국가들도 ‘군사 개입’은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베네수엘라의 회원 자격을 정지시킨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는 “대화와 외교적 노력 만이 베네수엘라 민주주의를 증진시키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밝혔다. 역내 국가 중 트럼프 정부와 가장 친밀한 관계로 알려진 콜롬비아조차 “베네수엘라 주권을 침범하는 군사조치에 반대한다”고 성토했다.
내정간섭으로 비칠 수 있는 미국의 군사행동은 중남미에서 금기나 다름 없다. 1980년대 파나마 침공 등 냉전시절 이 지역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미 정부가 자행한 수많은 군사공작의 아픈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크 페이어스타인 미 국가안보회의(NSC) 전 선임국장은 “지금까지 ‘미국이 베네수엘라 침략을 준비하고 있다’는 마두로의 말을 모두가 웃어 넘겼지만 이제 그 주장이 사실로 입증됐다”고 비판했다. 마두로는 그간 ‘미국이 베네수엘라의 막대한 석유를 노리고 있다’는 논리로 실정(失政)을 은폐해 왔는데, 트럼프가 직접 무력사용 여지를 남기면서 내부 분열을 봉합할 구실만 줬다는 설명이다.
트럼프의 경솔한 발언은 미국과 남미국가들의 공동전선에도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실제로 중남미 17개국 외무장관들은 8일 최초로 베네수엘라를 ‘독재국가’로 규정하고, 페루는 11일 자국 주재 베네수엘라 대사를 추방하는 강수까지 둔 바 있다. 또 미 정부가 지난달 마두로 대통령 등에게 단행한 경제제재에 전부 찬성하는 등 미국에 줄곧 협력적 자세를 취해 왔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13일부터 베네수엘라 사태 해결을 위해 중남미 4개국 순방에 나서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귀가 따갑도록 충고만 듣게 될 것”이라며 “트럼프의 사려깊지 않은 입이 미국의 정책은 물론, 남미 지역 안정에도 해악을 끼치고 있다”고 밝혔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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