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여름 휴가는 ‘워너원 주간’으로”
직장인 이모(30)씨는 여름 휴가를 그룹 워너원이 데뷔한 이달 첫째 주로 택했다. 새 앨범과 공연 등을 보는 ‘워너원 주간’으로 잡아 회사 업무에서 벗어나 ‘덕질’(마니아 활동)을 즐기기 위해서다. 이 씨는 “그동안은 가볍게 아이돌 ‘덕질’을 했는데 워너원은 내가 직접 뽑은 연습생들이 데뷔해 더 애정을 갖게 됐다”며 웃었다. 8일 오전 8시 서울 광화문 지하철역 4번 출구. 이씨는 워너원 데뷔 앨범 ‘1X1=1’을 사기 위해 오전 6시부터 음반 매장인 교보핫트랙스 입구 앞에서 줄을 서 있었다. 매장에서 CD를 사면 팬 사인회에 응모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새벽부터 나섰다. 케이블 음악채널 Mnet의 오디션프로그램 ‘프로듀스101’ 시즌2를 매주 ‘본방 사수’했다는 이씨는 연습생 강다니엘을 ‘픽’했다. 이날 음반 매장에는 전남 광주에서 올라온 워너원 팬도 있었다. “박지훈의 팬”이라는 대학생 박모(20)씨는 “빨리 CD를 손에 쥐고 싶어” 새벽부터 줄을 섰다.
아이오아이보다 커진 팬덤, 세련되진 음악
‘국민 프로듀서’라 불리는 시청자를 등에 업은 워너원의 인기가 뜨겁다. 음원ㆍ음반 시장에선 이미 거물이다. 워너원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한 YMC엔터테인먼트(YMC)에 따르면 워너원의 1집은 선주문량만 50만장을 넘어섰다. 타이틀곡 ‘에너제틱’은 7일 오후 6시에 음원이 공개된 후 9일까지 멜론 등 주요 음원 차트 정상을 휩쓸고 있다. 갓 데뷔한 그룹은 2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데뷔 무대를 펼쳤다. 이 공연장에 섰던 아이돌 그룹은 빅뱅, 엑소, 방탄소년단 세 팀에 불과하다. 워너원은 지난해 ‘프로듀스 101’ 시즌1으로 먼저 데뷔한 걸그룹 아이오아이보다 팬덤이 두텁다.
음악도 세련돼졌다. 김상화 음악평론가는 “아이오아이를 시험대로 삼아서인지 타이틀곡 ‘에너제틱’을 비롯해 앨범의 완성도가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에너제틱’은 하우스 장르의 전자 음악을 11명의 멤버들이 자유롭게 이끌어 가볍게 몸을 흔들며 듣기 좋다.
6개월 길어진 계약… 아이돌 육성해 돈벌이 나선 방송사
팬들에게 받는 사랑은 누구보다 뜨겁지만, 워너원은 정작 가요계에선 시장 생태계를 파괴하는 황소개구리 취급을 받고 있다. 가요기획사들은 “워너원이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고 날을 세운다. 프로그램의 화제성으로 음원차트를 상대적으로 손쉽게 싹쓸이 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방송사의 막강한 전파력을 통해 얼굴을 알린 오디션 스타들은 그렇지 못한 가수보다 곡 노출 효과에서 우위를 점할 확률이 높다. 음원 경쟁의 출발선이 다른데 과연 공정한 경쟁이라 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라는 게 가요기획사 관계자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가요계에서 워너원의 활약을 바라보는 눈이 곱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방송사가 워너원을 활용해 돈벌이에 나선 탓이다. Mnet을 소유한 CJ E&M은 워너원을 내년 12월까지 계약으로 묶어 놨다. 멤버 11명의 소속사에서 전속권을 위탁 받아 관리하는 식이다. YMC에 매니지먼트 외주 업무를 맡겼지만, 실질적으로 워너원 활동을 총괄하는 곳은 CJ E&M이다. 지난 6월에 프로그램이 종방했으니 계약 기간은 1년 6개월에 이른다. ‘프로듀스101’ 시즌1 출신 걸그룹 아이오아이의 계약 기간(1년)보다 6개월이 길어졌다. 계약의 사슬은 더 단단해졌다. 아이오아이의 멤버들은 소속사 활동을 병행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워너원 멤버들은 팀 활동 외 다른 활동을 할 수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작 워너원 멤버들의 소속사는 속앓이할 수 밖에 없다. 방송사가 계약 기간을 늘리고 팀 외 활동에 제약을 두면서까지 수익 창출에 열을 내는 것은 도를 넘은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한 가요기획사의 고위 관계자는 “프로그램이 끝났더라도 방송사가 음반을 내고 횟수를 정해 공연을 하는 것은 할 수 있다”라면서도 “하지만 1년 6개월이나 전속 계약권을 가져가면 연예기획사에선 소속 연습생의 연예 활동 계획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워너원 멤버가 속한 가요기획사 관계자에 따르면 CJ E&M은 그룹 수익의 25%를 가져간다.
“권력의 횡포”… 방송사에 공문 보낸 제작자들
Mnet에 이어 KBS는 조명받지 못한 가수들에게 다시 데뷔할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 ‘더 유닛’을 10월 방송을 목표로 제작에 착수했다. MBC도 가수 연습생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 기획에 돌입했다. Mnet을 시작으로 방송사들이 아이돌 육성 프로그램 기획에 잇따라 뛰어들면서 가요기획사들의 근심은 더 깊어졌다. 방송사들은 그간 자사 프로그램 출신 오디션 스타를 전폭적으로 밀어줬던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음악 등 예능프로그램이 한정돼 다른 아이돌은 출연할 기회가 더 줄어들지 않겠느냐는 우려다.
아이돌 그룹 한 팀을 보유한 가요기획사 대표는 “지금도 방송사 음악순위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 수많은 신인이 줄을 서고 있다”며 “방송사들이 앞다퉈 아이돌을 육성하면 협상력이 있는 대형 가요 기획사가 아닌 기획사들의 가수들은 출연하기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영화 산업에서 대기업이 제작ㆍ배급ㆍ상영을 겸하는 수직계열화로 유통 질서가 왜곡됐다는 논란과 같은 맥락의 지적이다.
가요계의 위기감이 커지자 결국 관련 단체들이 나섰다. 한국매니지먼트연합(한매연)과 한국연예제작자협회, 한국음악콘텐츠산업협회는 KBSㆍMBCㆍSBS 지상파 방송 3사와 Mnet, 종합편성채널 jtbc 등에 지난 2일 공문을 보내 방송사의 아이돌 육성을 통한 매니지먼트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 한매연은 지난 9일 성명을 내 “방송사들이 매니지먼트까지 하는 것은 연예 산업을 독식하려는 권력의 횡포”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대중의 환호에 가려진 워너원의 짙은 그림자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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