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을 한 달 남짓 앞두고 있는 저로서는 심정이 어떠하냐는 질문을 자주 받고 있습니다. 제가 “개운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 같겠지요. 사실은 개운하면서도 뿌듯합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세상에 정년까지 몸담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은 하나의 고집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저는 정년퇴직을 하고 싶어서 지금까지 학교 일을 계속 했고, 드디어 결승점에 닿았습니다.
정년까지 있으면서 보람도 컸지만 갖가지 일들을 겪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제가 겪었던 여러 가지 감정 중 좋았던 감정들만 체에 걸러서 간직하고 싶습니다.
몇 년 전 연말에 한 분이 저에게 지우개 하나를 주셨습니다. 한 해를 넘기면서 나쁘게 새겨졌던 감정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라면서. 퇴직을 앞둔 저로서는 아름다웠던 감정만을 간직하고 싶습니다. 저도 남에게 불쾌한 감정을 심어준 실수를 틀림없이 했을 겁니다.
퇴직을 앞둔 지금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제자들과의 인연이 가장 큰 수확인 것 같습니다. 앞 마당에 열린 첫 수확이라며 가지 하나와 오이 하나를 들고 와서 저에게 공손하게 내밀었던 남학생 제자, 음악동아리를 만들어서 전국 소년원과 교도소에 다니면서 선화교육을 함께 했던 그 제자들, 국제인형극페스티벌에 가서 입상한 후 결혼하고도 줄곧 ‘대통령’이라는 이름으로 만나오는 나의 제자들, 한라산에 졸업여행가서 걷기 싫어하는 나를 기어이 백록담까지 끌어 올려놓은 불굴의 제자들, 그 외 결혼해 살림을 예쁘게 살거나 사회활동을 하면서 지금까지도 서로 왕래하고 있는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 나의 가장 큰 보람입니다.
퇴직을 하면 이제는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내가 받은 만큼 남들을 위한 기도를 정성 들여서 나날이 할까 합니다. 기도는 운전하면서도 할 수 있고 길을 걸으면서도, 텃밭 일을 하면서도, 가족들을 위한 식사 준비를 하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한참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어린 아이들을 위해 온 마음으로 기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 읽지 못한 책들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겠습니다. 학생 한 명이 어느 날 제 연구실에서 담소를 나누다가 “교수님, 여기 있는 책 다 읽었어요?”라고 말하더군요. 읽기는 다 읽었지만, 양심에 좀 찔렸습니다. 서둘러서 읽거나 필요한 대목만 읽은 책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편안하고도 여유롭게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게 읽고 싶습니다.
몇 년 전이지만 타계하신 성철 스님의 누더기 옷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퇴직을 앞둔 지금으로서는 ‘노승의 기운 옷처럼’ 살고 싶습니다. 스님의 옷이 낡은 만큼 스님께서는 많고 많은 연륜을 쌓으셨다는 의미이겠지요. 낡고 떨어진 곳은 겪어온 스토리이자 흔적이겠지요. 새 천을 댈수록 새로운 스토리와 경륜이 쌓여지는 것이며 올올이 옷을 기워준 자들은 얼마나 정성을 다했을 까요. 한 땀 한 땀에 존경과 사랑을 아롱다롱 심었을 겁니다. 깨끗하게 세탁하고 정성껏 다림질하여 큰 대나무 옷걸이에 의연하게 걸어놓은 그 모습에서 성철스님의 고매한 인품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제가 정년퇴임을 한다지만, 아직도 여러 가지 일들이 매듭지어지지 않고 이어지기 때문에 퇴직을 한다는 느낌도 약합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지나간 일들을 정리하고 앞날을 새롭게 설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저의 주요한 삶의 맥은 지속적으로 뜻 깊게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퇴직은 어쩌면 마침표가 아니고 쉼표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정화 한국숲유치원협회 회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