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르파티(amorfati). 운명(fati)을 사랑(amor)한다, 운명에 대한 사랑이라 해서 흔히 ‘운명애’라 번역됩니다. 니체의 핵심 키워드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운명을 사랑한다’라고만 말하면 숙명론을 떠올리게 합니다. 운명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겠다는 자세, 포즈, 뉘앙스가 사라집니다. 그래서일 겁니다. 이 책의 제목을, 그러니까 ‘운명에 대한 사랑’을 ‘운명으로 달아나라’라고 또 한번 매만진 이유가.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래서 비극적 상황에 처한다는 것은, 어느 날 벼락처럼 닥친 운명의 소용돌이에 속절없이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래서 그 운명에 대해 난 널 몰랐노라 변명하고 저주하는 게 아닙니다. 네가 내 운명이라면 진작에 잘 찾아오라고 내비게이션이라도 달아주려는 태도, 그리하여 마침내 만난 운명을 적극적으로 살아내 버리고야 말겠다는 태도를 말합니다. 바로 그것이 운명에 대한 사랑일 테고, 그걸 조금 더 문학적으로 꾸민 말이 운명을 향해 달아나는 행위일 겁니다. 저자의 표현대로 운명애란 “필연을 의지의 행위로 바꿔놓고야 마는 행위”일 테니까요.
‘너의 운명으로 달아나라’(마음산책)는 ‘로쟈’라는 필명으로 더 유명한 서평가 이현우씨가 니체의 ‘운명애’를 키워드로 읽을 만한 세계문학 작품들을 골라 해설한, 일종의 세계문학 가이드입니다.
니체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간단한 독해로 워밍업을 한 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최후의 유혹’을, 서머싯 모옴의 ‘달과 6펜스’ ‘면도날’을,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을 찬찬히 읽어나갑니다. 모옴이 여성혐오적이라는 비판에 대한 얘기나, 어릴 적 음악교육을 받은 쿤데라가 다성악과 소설과 민주주의를 연결하는 방식에 대한 얘기 등이 흥미롭습니다.
그 가운데 카잔차키스가 예수의 마지막 순간을 새롭게 해석한 소설 ‘최후의 유혹’ 얘기가 좋습니다. 이건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십자가에 매달린 최후의 그 순간, 천사는 예수를 해방시켜 가족을 데리고 알콩달콩 잘 살게 만들어줍니다. 어느 순간 예수는 이 삶이 거짓이며 악마의 유혹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깨닫자마자 다시 골고다 언덕 십자가로 돌아와 죽음을 맞이합니다. 저자는 “마지막까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지만 이 길을 택했다는 것, 하느님의 뜻을 수락했다는 것” 그 것으로서 예수는 명령을 이행하는 자가 아니라 주인이 되었다고 봅니다. 동시에 운명을 받아들인 그 행위로 인해 예수 이후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카잔차키스가, 스코세이지가 그려내려 한 ‘운명애’입니다.
새벽녘 바람이 차츰 시원해집니다. 여름휴가 시즌도 마무리 단계입니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 일할 게 아득한 이들에게 권합니다. 회사를 다녀야 할 비극적 운명을 만났다면, 징징댈 것만 아니라 그 운명의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테니까요. 휴가란 달콤한 악마의 유혹일 뿐입니다. 써놓고 보니 왠지 니체와 저자 뿐 아니라 모든 직장인들에게 뭔가 죄 짓는 기분이 들긴 합니다만, 혹시 압니까. 그런 운명애가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줄지.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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