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안보포럼 참석차 6일 새벽 도착
‘南과 대화 생각 있냐’ 등 질문에 침묵
일행이 대신 “강 장관 만날 계획 없다”
공항 취재 불허하고 숙소도 철통 경호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참석차 필리핀에 온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침묵했다. “기다리라”는 한 마디가 전부였다.
리 외무상은 ARF가 열리는 필리핀 마닐라 니노이 아키노 공항에 6일(현지시간) 0시 30분쯤(한국시간 오전 1시 30분) 도착했다. 고려항공 편으로 중국 베이징(北京)을 경유해서였다. 감색 양복에 비슷한 색상의 흰색 무늬 넥타이를 맨 리 외무상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을 만날 의향이 있느냐’,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을 만날 것이냐’ 등 취재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마중하러 나온 ARF 주최측 인사들과 악수를 나눈 뒤 공항 귀빈(VIP)실로 들어갔다.
숙소로 이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검은색 BMW 승용차를 타고 마닐라 뉴월드 호텔로 이동한 리 외무상은 호텔 입구와 1층 통로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국ㆍ일본 등의 취재진 수십명이 ‘소감 한 말씀 부탁한다’, ‘남측과 대화할 생각이 있느냐’, ‘(유엔의) 대북 제재 결의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등 질문들을 쏟아냈지만 옅은 미소만 머금고 객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만 ‘강경화 장관을 만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리 외무상을 바로 뒤에서 수행하던 북측 대표단 일행 중 한 명이 대신 몸을 돌려, “만날 계획이 없다”고 짧게 대답하기도 했다.
객실 앞에서는 결국 입을 한 번 열었다. ‘이번 회의에서 북한 어떤 나라라고 강조하고 싶으냐’는 한국 기자의 질문에 리 외무상은 “기다리라”고 답했다. 마닐라에 도착해 그가 취재진에게 한 유일한 말이었다. 마닐라 체류 기간, 어떻게든 입장은 밝히겠다는 뜻으로 들린다.
당초 북한 측이 리 외무상에 대한 공항 내 취재를 허가하지 말아달라는 입장을 주최측에 밝혔지만 이날 공항엔 리 외무상 도착 1시간여 전부터 취재진 수십명이 몰렸다. 필리핀 측은 리 외무상이 머무는 호텔 입구와 객실용 엘리베이터를 잇는 통로에도 보안 요원들을 대거 배치해 리 외무상 가까이 취재진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등 철통 같은 경호를 했다.
리 외무상은 7일 열리는 ARF 외교장관 회의에 참석해 핵 문제와 역내 정세와 관련한 북한의 입장을 밝힐 것으로 보인다. ARF는 북한이 참여하는 유일한 역내 다자 안보 협의체다. ARF 개막을 도출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신규 대북 제재 결의도 미국의 적대 정책 일환이라고 비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달 예정된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한미연합 군사연습을 문제 삼을 가능성도 있다.
최근 북한은 평양에서 북한 주재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 회원국 외교관들을 불러 ‘정세통보 모임’을 열고 최희철 외무성 부상을 필리핀에 파견해 사전 정지 작업을 하는 등 아세안을 대상으로 한 여론전에 공을 들여 왔다. 그러나 5일 아세안 외교장관들이 북한의 잇단 핵ㆍ미사일 도발을 규탄하는 별도 성명을 내는 등 상황은 북에 불리해 보인다. 더욱이 미국이 북의 ARF 참가 자격 철회를 거론할 정도로 대북 압박 수위를 끌어 올린 상황이다. 유엔 안보리는 5일 회의를 열어 북한의 석탄ㆍ철광석 등 주요 광물과 수산물 수출 금지, 신규 해외 노동자 수출 차단 등을 골자로 하는 대북 제재 결의 2371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중국과 러시아도 반대하지 않았다.
ARF를 계기로 리 외무상이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나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양자 회담을 할 가능성도 작지 않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한반도 배치를 둘러싼 한중간 갈등이 고조되는 시점에 열린 지난해 ARF에서 왕이 부장은 리 외무상과 양자 회담을 하면서 노골적으로 친근감을 과시한 바 있다. 지난해 5월 취임한 리 외무상은 이번이 두 번째 ARF 참석이다. 마닐라=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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