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필리핀의 한 낙후된 마을을 방문한 유영제(65)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는 주민들이 모두 비슷한 피부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원인은 더러운 물에 있었다. 제대로 된 하수처리 시스템이 없어 주민들 모두가 가축 분뇨 등 갖가지 오염 물질로 가득한 물을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유 교수가 ‘적정 기술’, 즉 지역 조건에 맞는 기술의 필요성을 느끼고 ‘국경없는과학기술자회’를 만들게 된 계기다.
유 교수가 이달 말 정년퇴임으로 캠퍼스를 떠나게 됐다. 1986년 처음 교수가 돼 캠퍼스에 자리잡은 지 31년만이다. 바이오테크놀로지(BT) 분야를 연구해온 유 교수는 그간 300여 편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하는 등 왕성한 연구활동을 해왔다. 효소 단백질 연구에 있어 우리나라 최고 권위자로 꼽히기도 했다. “이제야 한국의 바이오 산업이 일어서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연구를 접으려니 아쉽습니다.”
유 교수가 동료 교수들과 함께 뜻을 모아 창설한 국경없는과학기술자회는 휴대용 정수기, 태양광 패널이 결합된 정수기 등 다양한 적정 기술을 개발해 개발도상국에서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을 실질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적정 기술과 지속 가능한 기술을 개발, 보급하기 위해서다. 유 교수는 “제3세계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최첨단 기능을 가진 물건이 아니다”라며 “그 나라 상황에 가장 적합하고 필요한 기능을 극대화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얼마 전 서울대 교수 50여명이 모여 만든 사회공헌교수협의회에 유 교수는 공동 회장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각 분야 교수들이 모여 개발도상국에 공헌할 방식을 의논하는 뜻 깊은 자리이기 때문. 유 교수는 “미국이 옛날 ‘미네소타 프로젝트’로 서울대에 큰 도움을 줬듯이, 우리나라도 개발도상국에게 도움을 주자는 취지”라고 협의회를 설명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6ㆍ25전쟁 후 미국이 참여한 서울대 재건 프로젝트다.
유 교수는 최근 들어 터지기 시작한 대학원생에 대한 교수의 ‘갑(甲)질’ 문제에도 우려를 표했다. 그는 “교수와 대학원생 관계는 기본적으로 갑을이 아니라 협력 관계여야 한다”며 “단순 업무가 아니라 창의력과 도전정신을 길러주는 대학원 교육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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