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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탄압은 내 운명… 블랙리스트 예술가들

입력
2017.08.0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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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첫 회의에서 공동위원장을 맡은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왼쪽 두번째)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첫 회의에서 공동위원장을 맡은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왼쪽 두번째)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문화ㆍ예술계 블랙리스트 논란이 길어질 것 같다. 박근혜 정권 아래 좌파성향 예술가들을 배제하기 위해 블랙리스트를 작성 및 관리한 혐의를 받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대해 법원은 지난달 1심에서 각각 징역 3년과 무죄를 선고했다. 문화계는 형량이 죄에 못 미친다며 즉각 반발했다. 김 전 실장은 혐의를 부인하며 판결 다음날 항소했고, 특검도 판결에 불복해 피고인 전원에 대해 항소했다. 식을 줄 모르는 싸움판을 보며 또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언제쯤 말할 수 있을까. 이 싸움, 이 드라마, 대체 언제 끝나냐고.

지루해해선 안 된다. 아직 싸우는 중이기 때문이다. 2014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한 민중미술가의 그림이 전시 불허 판정을 받았다. 그림 한편에선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 짐작되는 허수아비가 성난 민중과 싸우고 있고, 다른 한편에선 가난해 보이는 남녀가 뒤집힌 배를 받치고 있다. 배에는 ‘SEWOL’이란 글자가 박혀 있다. 그림이 아름다운지, 발상이 어떻고 비유가 어떤지 말할 새가 없었다. 싸우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올해 1월 개봉한 한국 영화 ‘더 킹’에선 부패 검사들이 등장한다. 룸살롱에서 초짜 검사와 만난 선배 검사는 “그냥 권력 옆에 있어”라는 인터넷 소설 같은 대사를 날리며 그를 ‘악의 무리’로 끌어 들인다. 한국 정치사를 온전히 선악구도로 이분화하는 이 영화는, 내부고발자로 거듭난 후배 검사가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끝난다. 감독은 당선여부를 가린 채 관객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다. “당신이 바로 대한민국의 왕입니다!” 난데 없는 투표독려에 의아함을 표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당시는 ‘박근혜 탄핵’과 대선이 맞물린 시기였다. 역시나 싸우는 중이었다.

예술 탄압의 역사를 좇아 올라가자면 끝이 없겠지만, 블랙 리스트의 직접적인 뿌리가 되는 건 박정희 정권이다. 1970년대 초 유신 선포와 함께 ‘반체제’ 냄새만 풍겨도 빨갱이로 몰아 때려 잡았던 서슬 퍼런 정권 아래서, 예술가들은 붉고 푸르게 저항했다. 현재 문학, 음악, 미술 등 각 장르를 대표하는 단체들엔 그때 얻은 상처가 하나씩 있다.

예술은 탄압을 먹고 자라기도 한다. 그러나 탄압만 먹고 자란 예술은 재미가 없다. 그리고 폭력의 가장 폭력적인 면은 가해자가 피해자와 기어이 공통의 언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때리는 자의 언어는 ‘금지’이고 맞는 자의 언어는 ‘저항’이다. 둘은 같은 언어권에 속한다. 저항의 역사가 길수록 언어는 고착되고 새로운 언어가 들어설 자리는 사라진다. 저항가들이 알아 듣는 언어는 오로지 금지, 그리고 자신의 투쟁에 대한 연민과 위로뿐이다.

올 초 박근혜 전 대통령을 풍자하는 누드화 ‘더러운 잠’을 전시했던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 지난해 촛불시위 때 ‘미스 박’이란 가사가 포함된 노래 ‘수취인분명’을 발표한 가수 DJ DOC가 세간의 논란 앞에 지었던 표정은 이 고착화된 언어의 현주소다. 그들은 진심으로 어리둥절해한다. ‘이렇게 용기를 낸 나에게, 어째서?’

아연함은 불행히도 각성이 아닌 서운함으로 이어진다. 정겨운 한국 사회에서 서운한 사람은 일단 열외다. 때리는 소리와 우는 소리가 가득한 집구석에서, 인간된 도리로 둘 다 조용히 하라고 하긴 어렵다.

그럼 언제쯤 말할 수 있을까.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법원은 1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공범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보수진영 대통령이 '좌파 배제, 우파 지원'을 표방한 것 자체는 위법이 아니다”는 게 요지다. 다시 보수정권이 집권할 때 우리는 “참 나쁜 사람”이란 말을 또 들어야 할지 모른다. 끝나기만 기다리는 드라마에, 법원은 열린 결말이라는 폭탄을 투척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너무 이른 말이다. 그만하라는 말, 끝내라는 말, 지겹다는 말. 이 말이 여전히 이른 말이라는 게, 이 나라 문화 소비자들의 슬픔이다.

황수현 문화부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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