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출범은 1997년 이후 굳어진 불평등과 빈곤의 악순환을 끊고 복지국가 확대를 위한 새로운 순환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까? 지난 7월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서 발표한 ‘국정운영 5개년 계획(계획)’은 앞으로 5년 동안 문재인 정부가 만들어갈 한국 사회의 큰 그림을 담았다. 준비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계획’은 의미 있는 비전과 내용을 담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민주정부 10년을 돌아보면 ‘계획’이 실현될지에 대한 확신은 물론 ‘계획’이 실현된다고 해도 문재인 정부가 고착화된 불평등과 빈곤을 해소하고 복지국가를 만들어 가는 불가역적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의욕 넘치는 기획에도 불구하고 ‘계획’이 한국 복지체제의 역사적 유산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1960년대 산업화 이래 한국 사회는 공무원, 교사 등 체제수호 세력과 핵심 산업에 고용된 노동자에게 상대적으로 안정된 고용과 높은 임금을 지급하고, 낮은 세금을 부과해 가구의 가처분 소득을 높여주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처분소득은 이들 중산층 가구가 개인저축, 민간보험, 부동산 등을 구매해 실업, 노령, 질병 등 사회위험에 대응하는 사적 보장체계를 만들 수 있도록 했다. 국민연금, 고용보험 등 공적 사회보험도 국가의 재정 투입을 최소화해 비정규직과 영세자영업자를 배제하고, 동일한 중산층 가구의 사적 보장체계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제도화되었다.
한국 복지체제의 유산이 이와 같다면 ‘계획’은 민간보험, 부동산 등 가족단위의 사적 보장제도의 역할을 축소하고, 공적 사회보장 제도의 역할을 보편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전향적인 실천 계획을 담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계획’이 이를 담고 있는지는 논쟁적이다. 예를 들어, 부동산과 민간보험이 공적 사회보장제도의 보편적 확대를 가로막는 중요한 걸림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계획’은 이에 대한 적극적 대책을 담고 있어야 했다.
또한 ‘계획’은 ‘계획’에 담겨있는 복지정책들이 모여 한국이 어떤 복지국가로 나아갈지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포용적 복지국가’가 제시되었지만, 그 내용을 보면 개별 복지정책을 열거한 것이지 국가 비전으로서 복지국가의 상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 ‘계획’은 노무현 정부가 만든 ‘비전 2030’이 제시한 복지지출의 양적 목표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계획’이 적절한 증세계획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뒤늦게 부자증세를 발표했지만, 부자증세로는 소요재원을 조달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계획’에는 복지정치에 대한 고민이 없다. 복지는 단순히 급여를 제공하는 도구가 아닌 정치적 지지기반을 확장하고 동맹을 만들어가는 정치적 실천이다. 그렇다고 복지확대의 수혜자가 곧바로 문재인 정부의 지지기반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지지기반은 개혁을 위해 반개혁세력에 맞서는 실천과정에서 결집하고 단단해지면서 형성되는 것이다. 국민 모두의 지지를 받겠다는 행보는 국민 그 누구로부터도 지지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두 번의 민주정부는 반대세력이 아니라 민주정부를 탄생시켰던 그 지지자들의 이반으로 무력화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 복지체제의 유산에 기초한 비전과 전망이 모호하고, 복지정치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지 않은 ‘계획’으로 문재인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정세에 따라 신자유주의와 사민주의적 실천을 원칙 없이 교차하는 오류를 반복할 뿐이다. 더욱이 신자유주의화한 경제체제를 복지 확대로 막는 방식으로는 고착화된 불평등과 빈곤을 해소할 수 없다. 결국, 평등한 사회를 염원하는 촛불시민혁명에 부응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굳건히 다져야 하고, 그 기초 위에서 평등한 한국 복지국가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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