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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잡는 과학] 필리핀 사탕수수밭 시신 3구, 부족한 증거를 채워라!

입력
2017.08.0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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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3명이 지난해 10월 숨진 채 발견된 필리핀 팜팡가주 앙헬레스 사탕수수밭 전경. 서울경찰청 제공
한국인 3명이 지난해 10월 숨진 채 발견된 필리핀 팜팡가주 앙헬레스 사탕수수밭 전경. 서울경찰청 제공

지난해 10월 11일 오전 6시(현지시간) 필리핀 팜팡가(Pampanga)주 앙헬레스(Angeles). 비가 그친 아침, 끝도 없이 펼쳐진 사탕수수밭으로 들어서던 농부는 새빨간 피 웅덩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로 옆으로는 3m에 달하는 사탕수수 줄기가 비탈을 따라 한 쪽으로 누워있었다. 누군가 무거운 물체를 비탈로 굴린 흔적. 조심스레 줄기가 가리키는 방향을 들여다보던 농부 눈에 흙으로 반쯤 덮인 채 버려진 사람이 들어왔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제대로 땅도 파지 않고 대충 갈무리된 상태. 머리에 총상이 있는 시신이었다.

필리핀 경찰은 11m 떨어진 곳에서 시신 두 구를 추가로 발견했다. 남성 한 명과 여성 한 명이 포개져 숨져 있었고, 역시나 머리에 총상이 뚜렷했다. 같은 부위 총상, 동일한 장소. 범인은 한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필리핀 경찰은 한국에서 수사 공조 차 파견 나온 코리안데스크에 곧장 도움을 청했다. 시신 인상착의를 볼 때 한국인이 분명했다. 한국으로 보낸 채취 지문 조회 결과 신원은 금세 나왔다.

당시 농부가 한국인 시신 세 구를 발견한 장소. 서울경찰청 제공
당시 농부가 한국인 시신 세 구를 발견한 장소. 서울경찰청 제공

피해자들은 서울 강남구에서 다단계 유사수신업체를 운영하던 A(당시 47)씨와 B(당시 51)씨 그리고 C(당시 48ㆍ여)씨였다. 사건 두 달 전인 8월 중순 다단계로 약 150억원을 가로채 경찰 수사를 받던 중 사라진 사기 일당이었다. 다단계 피해자 누군가가 원정 보복 살인을 한 걸까.

경찰은 수사 전문가 4명을 급파했다.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 김진수(47) 경위와 프로파일러 윤태일(44) 경사, 국제범죄수사대 팀장 정백근(50) 경위, 그리고 총기 살인인 점을 감안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총기연구실장 김동환(56) 박사로 이뤄진 ‘드림 팀’이 필리핀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피해자들의 시신이 발견된 사탕수수밭 현장을 지난해 10월 14일 한국에서 파견된 수사팀이 감식하고 있다. 서울경찰청 제공
피해자들의 시신이 발견된 사탕수수밭 현장을 지난해 10월 14일 한국에서 파견된 수사팀이 감식하고 있다. 서울경찰청 제공

기대할 건 현장뿐이었다.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사탕수수밭 안에서 발견되기를 바랐다. 섭씨 38도가 넘는 날씨, 가만히 서 있어도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으면서 수사팀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탄피라도 나온다면 강선(총기 내부에 나사 모양으로 파 놓은 홈) 흔적을 보고 총기 종류를 알아 낼 수 있고, 만약 등록된 총이라면 용의자를 쉽게 특정할 수 있을 겁니다.” 필리핀 경찰 도움으로 사탕수수를 베어낸 수사팀은 김 박사 독려 아래 오후 내내 바닥에 쪼그려 앉아 흙을 체로 걸러냈다. 그렇게 꼬박 이틀. 반경 11m 넘는 땅을 이 잡듯 훑었지만 탄피는 나오지 않았다.

수사가 제자리걸음만 한 건 아니었다. 한인 커뮤니티가 힘을 발휘했다. 앙헬레스에는 한국인 24가구가 모여 사는 ‘고향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거주민 중 한 명이 “마을에서 피해자들을 목격한 적이 있다”는 증언을 해준 것이다. 피해자 숙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해자들은 현지 불법도박장에서 일하던 박성열(가명ㆍ39)씨 명의 집에 살고 있었다. 박씨는 사건 직후 한인회 자치기구에서 부르자 직접 찾아가 “피해자들과는 카지노 투자 사업을 함께하던 사이”라며 “몇 달간 같이 지낸 건 맞지만 누가 죽인 건지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고 했다. 박씨가 범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지만 증거가 없었다. 박씨를 다시 불러 조사할 명분도 없었다.

피해자들과 박성열, 김동수가 지난해 두 달 간 함께 지내던 고향빌의 숙소 전경. 서울경찰청 제공
피해자들과 박성열, 김동수가 지난해 두 달 간 함께 지내던 고향빌의 숙소 전경. 서울경찰청 제공

수사팀은 피해자 집을 꼼꼼히 살폈다. 집에서 피해자들을 살해한 뒤 사탕수수밭으로 옮겼을 수도 있었다. 김진수 경위는 거실과 방 구석구석을 루미놀(혈흔과 만나면 형광 빛을 내는 시약)을 뿌려가면서 조사했다. 어디에도 흔적은 없었다. “적어도 이 숙소는 범행 현장이 아니라는 얘기군.” 피해자들이 사탕수수밭에 끌려가는 도중에, 혹은 그 뒤에 살해됐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거실에서 빈 콜라 캔 4개가 발견됐다. ‘피해자 세 명과 범인 한 명?’ 김 경위가 캔 표면에 지문 채취용 분말을 발랐다. 지문 두 개가 드러났다. 상태가 좋았다. 지문 형태를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뒤, 서울에 있는 과학수사센터로 보냈다. “지금 당장 지문 조회 부탁합니다. 빨리요!” 회신 결과, 하나는 집주인 박씨, 다른 하나는 김동수(가명ㆍ35)씨 것이었다. 새로운 인물이었다. “김동수? 누구지?”

당시 콜라캔에서 채취한 지문. 수사팀은 이 사진을 서울로 보내 용의자 김동수 특정에 성공했다. 서울경찰청 제공
당시 콜라캔에서 채취한 지문. 수사팀은 이 사진을 서울로 보내 용의자 김동수 특정에 성공했다. 서울경찰청 제공

‘김동수’라는 인물은 다른 곳에서도 포착이 됐다. 김 경위가 지문을 한창 확보하던 때, 정백근 팀장은 한인들이 주로 찾는 한인타운을 탐문하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박성열과 김동수가 같이 있었다”는 진술이 나왔다. 김동수라는 인물이 용의자로 급부상했다.

김씨는 사건 다음날 김해공항을 통해 한국으로 귀국한 상태였다. 원래는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는 15일 비행기표를 예약했지만, 급히 일정을 변경한 사실이 확인됐다. 정 팀장은 한국에 있는 국제범죄수사대 팀원들에게 ‘김동수 신병 확보’ 지시를 내렸다. 조사할 이유가 생긴 박씨는 이미 연락을 끊고 도주한 뒤였다.

정 팀장은 앙헬레스 시내에서 박씨가 목격된 곳 중심으로 폐쇄회로(CC)TV 수십 대를 확보해 분석에 들어갔다. 밤새 화면을 보던 정 팀장은 한국에 있는 수사팀에도 영상을 보내 분석하도록 했다. 한국에 온 CCTV 화면 용량만 총 4테라바이트(TB), CCTV 한 대가 한 달 동안 쉬지 않고 찍어야 나올 정도로 어마어마한 분량이었다.

고향빌 출입 장부에는 박씨 소유 차량 기록이 나왔다. 사건 당일 문제의 차량이 고향빌에서 오전 4시 나간 것으로 적혀있던 것이다. CCTV에는 고향빌 쪽을 벗어나던 차량이 그로부터 24분 후 사탕수수밭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드는 장면이 찍혔다. 농부가 시신을 발견한 때가 그날 오전 6시. 어느 정도 범행 시간 추정이 가능해졌다.

박씨가 한인회 조사에서 “피해자들을 오후 9시쯤 식당에 태워다 준 게 마지막이었다”고 말했지만, 식당 근처 CCTV에는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았다. 잠적 당일 박씨가 카지노에 맡겨뒀던 3,000만페소(약 6억7,000만원)를 찾아갔다는 기록도 발견했다. 여러 단서는 박씨를 유력 용의자로 지목하고 있었다. 물론 한국으로 급히 귀국한, 그와 가까운 김씨는 공범일 공산이 컸다.

하지만 그들을 살인범이라 지목하기엔 ‘결정적인 한 방’이 없었다. 19일 오전 11시쯤 경남 창원시에서 김씨가 긴급 체포됐지만,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는 그를 이튿날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가진 단서는 구속영장을 신청하기에도 부족했다.

21일 수사팀이 귀국했다. 김씨 자백을 받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몇 차례 불렀지만 성과가 쉽게 나올 리 만무했다. 그 사이 김씨 집에서 확보한 가방 끈과 반바지에서 잔류 화약이 발견됐다. 하지만 “사탕수수밭에 간 적이 없다”고 했다가 “가긴 갔는데 낮에 갔다”는 식으로 김씨 진술은 뒤죽박죽이었다. 시간은 그렇게 계속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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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 코리안데스크와 필리핀 이민청이 박씨를 마닐라에서 검거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정 팀장은 다시 한 번 김씨를 불러냈다. “아무리 증거를 들이밀면서 추궁해도 입을 안 열길래, 속을 박박 긁어놨죠.“ 정 팀장이 말했다. “박성열은 7억 가까이 챙겨서 여자랑 도망 다니는데, 너한테는 한 푼도 안 떨어진 거 아니냐는 식으로 도발을 했죠.” 도발과 자극 등 온갖 기술이 다 동원된 5시간. 아무 말 없던 김씨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같이 있었습니다. 사탕수수밭에요.” 막힌 둑이 터진 듯 사건 전말이 김씨 입에서 술술 터져 나왔다.

피해자들은 사기 혐의로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평소 알고 지내던 박씨에게 도움을 청해 필리핀으로 도피했다. 은신처를 제공한 게 박씨였고, 그 대가로 카지노에 공동 투자했다. 몇 달 뒤 돈 문제로 다툼이 생기면서 박씨는 피해자들을 제거한 뒤 돈을 독차지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김씨를 ‘킬러’로 끌어들였다. “1억원을 줄 테니 필리핀으로 와서 사람을 죽여달라”는 제안. 김씨는 단박에 승낙하고 10월 4일 필리핀으로 입국했다.

11일 오전 2시20분쯤 사건이 시작됐다. 박씨는 총으로 피해자들을 협박해 방 한 군데로 몰았다. 김씨는 겁에 질린 피해자들 손과 발을 테이프로 감고, 옷장 안 금고 비밀번호를 말하게 한 뒤 안에 든 돈을 챙겼다. 250만원 정도였다.

박씨와 김씨는 미리 준비한 승합차 트렁크에 피해자들을 싣고 사탕수수밭으로 향했다. 쓰러진 피해자들 목을 밟은 채 차례로 머리를 쏘고 비탈에 굴렸다. 김씨는 준비해간 삽으로 깊이 30㎝ 남짓 구덩이를 파 A씨를 대충 묻었다. B씨와 C씨는 11m 정도 끌고 들어가 아무렇게나 던졌다. 사람 손이 자주 닿지 않는 광활한 사탕수수밭, 운이 좋다면 몇 년간 발각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정 팀장은 “김씨가 귀국해서 버린 휴대폰을 경남 밀양강에서 찾아냈는데 거기서도 살인을 모의한 메시지 내용이 그대로 나왔다”고 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달 2일 강도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로 기소된 김씨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체포 후 필리핀 외국인보호소에 수감돼 있던 박씨는 올해 3월 탈옥까지 감행했다 두 달 만에 붙잡혀 현재 국내 송환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사탕수수/2017-07-31(한국일보)
사탕수수/2017-07-31(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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