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군자 할머니 장학생’들
“장학금 덕분에 대학 졸업”
23일 오전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작은 사진) 할머니가 경기 광주시 나눔의집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는 궂긴 소식이 들려왔다. 향년 91세. “짓밟힌 내 삶이 불쌍하고 억울해서라도 ‘내가 살아 있는 한’ 사과를 받아 내야 한다”고 했던 김 할머니는 일본 정부로부터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한 채 끝내 눈을 감았다.
억울함을 풀지 못한 김 할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각계각층 인사들과 시민들이 빈소로 찾아들었다. 그중에는 “할머니에게 빚진 게 있다”며 조용히 빈소를 찾은 이들이 있었다. ‘김군자 할머니 장학생’들. 김 할머니는 1998년부터 한국 정부에게 받은 배상금 1억원을 2000년, 2006년 아름다운재단에 전액 기부했다. “나도 고아로 자라 야학에서 8개월 배운 것이 전부다. 부모 없는 아이들이 나 같은 길을 걷지 않게 하고 싶으니 부모 없는 아이들에게 쓰였으면 한다”는 뜻과 함께.
첫날 부리나케 빈소를 찾은 노진선(30)씨는 이런 김 할머니 장학금 ‘2기 장학생’이다. 노씨는 김 할머니 별세 소식을 듣자마자 만사를 제쳐 두고, 달려갔다. 너무 급했던지 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빈소 인근에서 정장과 구두를 사야 할 정도였다. 그는 “마땅히 그래야 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노씨는 고아원을 나온 2007년 신흥대 자동차학과에 진학한 뒤 등록금이 없어 막막했던 그때, 김 할머니가 손을 내밀어 줬다면서 영정 앞에 고개를 숙였다. “장학금을 받고 나눔의집을 갔을 때 두 손 꼭 잡아 주었던 김 할머니의 따뜻한 체온은 평생 잊을 수 없어요. 부모님 없이 자라 온 저에게 든든한 ‘조력자’로서 지금도 할머니가 제 뒤에서 도와주시고 있는 거 같아요.”
“든든한 조력자 되어 주셨으니
할머니 운구 돕는 건 당연한 일
돌아가신 후에야 이름 알려져
잘 기억할 수 있게 고민할 것”
장학생 3명은 김 할머니 운구에도 참여했다. 최현재(26)씨는 “할머니 덕에 대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어 감사한 마음뿐 아니라 묘한 ‘동질감’까지 느껴 운구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그는 “‘가족이 없어 운구 해 줄 사람이 없다’는 말에 가족 없이 살아온 내 처지와 겹쳤다”며 “마지막 가시는 길에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최씨는 김 할머니를 떠올리며 “고통 이후의 삶이 더 고통스러우셨던 분”이라고 했다. 그는 “내가 감히 할머니가 겪으신 고통을 안다고 할 수 없다”며 “단지 할머니를 찾아 뵀을 때 ‘우리는 오후 4시가 되면 밥을 먹고, 먹고 나면 오후 5시가 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하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는 아쉬움도 토로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사람들은 ‘김군자’라는 이름을 얘기하기 시작했다”며 “이제라도 할머니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최씨는 끝으로 ‘김 할머니가 자주 한 말’이라면서 같은 말을 계속 되뇌었다. “내 삶이 한스러울 때가 많았지만 돌아보니 가진 것을 다 줘서 후회가 없다. 모두 즐겁게 살아라.” 최씨와 노씨를 포함, 지금까지 250명에 달하는 젊은이들이 김 할머니가 전해준 약간의 경제적 도움과 따뜻한 손길을 가슴에 담아 둔 채 살아가고 있다.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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