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 정점에서 진두 지휘
예술인 사회단체 등에 대한
편향된 지원행위 근절될 전망
“朴, 노태강 사직 강요는 부당,
블랙리스트 공범으로 보긴 어렵다”
27일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징역3년을 선고한 법원은 문화ㆍ예술인들에 대한 정부 지원 배제(블랙리스트)조치를 국가의 정책적 판단이 아닌 사법적 처벌 대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정부 차원의 지원배제 행위의 형사 처벌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은 향후 예술인은 물론 사회단체 등에 대한 지원 문제에 대한 기준이 될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부장 황병헌)는 블랙리스트 실체를 인정하는 동시에 블랙리스트 작성 자체가 헌법가치를 명백히 훼손하고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지원배제는 헌법과 문화기본법이 규정하는 ‘문화ㆍ표현 활동이 차별 받지 않을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며 “정치권력의 기호에 따라 지원을 배제한 것은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고 블랙리스트가 형사 처벌 대상이라는 점을 조목조목 짚었다.
사실 ‘정책적 판단은 형사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김 전 실장 측의 주장은 이번 사건의 최대 쟁점이 됐다. 김 전 실장은 사회단체 등에 대한 국가 지원이 정권 성향에 따라 달라졌던 게 사실이지만 이런 일이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는 논리를 폈고, ‘비정상화의 정상화’라는 정책적 프레임도 내걸며 무죄를 주장해 왔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특히 ‘비정상의 정상화’ 주장과 관련해선 투명성을 강조했다. 좌편향된 국가지원을 바꾸려고 정책 결정을 한 것이었다면 투명하게 추진했어야 한다는 취지다. “이 사건은 반대로 은밀하고 위법한 방식으로 진행됐다”는 게 재판부 판단이다.
블랙리스트 사건의 정점에 김 전 실장이 있었다는 점도 드러났다. 재판부는 “김 전 실장 등 피고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막대한 권한을 남용해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범행을 계획하고 실행 지시를 담당했다”고 판시했다. 특히 한 때 ‘미스터 법질서’라고 불린 김 전 실장에게 법치수호의 의무를 저버렸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재판부는 “비서실장으로서 누구보다 법치주의를 수호하고 적법절차를 준수할 임무가 있는데도 가장 정점에서 지원배제를 지시했다”며 “그럼에도 자신은 전혀 지시하거나 보고받지 않았고, 또는 기억나지 않는다며 책임회피로 일관했다”고 질타했다.
이번 판결로 정부가 기호에 따라 예술 단체 등을 편향되게 지원하는 행위가 근절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이날 재판부는 ‘정부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팔 길이 원칙’을 거론하며 “배제할 개인ㆍ단체를 청와대와 문체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해 하달했고, 문화예술위원회 등 (독립이 보장돼야 할 단체의)존재 이유를 유명무실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국가 예산은 공적인 돈이고, 어느 정권이든 헌법적 가치를 침해해서 공적 가치를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첫 판례를 남긴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 전 실장 등의 재판 결과가 박 전 대통령 재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관심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공소장에 김 전 실장과 블랙리스트 순차 공모의 공범으로 지목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블랙리스트 작성 지시 혐의로 김 전 실장 등과 함께 기소됐지만 다른 재판부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보고받았을 개연성은 크지만 증거를 종합해봐도 지원 배제 범행을 지시 또는 지휘해 공범으로서 책임을 진다고 보긴 어렵다”고 판단했다. 블랙리스트를 주도한 건 박 전 대통령이 아닌 김 전 실장이라고 본 것이다.
다만 재판부는 노태강 당시 문체부 체육국장(현 2차관)에 대한 사직 강요 혐의(직권남용)와 관련해선 박 전 대통령의 공모관계를 인정했다. “대통령의 지시는 부당한 지시임이 명백하다”고 밝혀 사실상 ‘주범’에 해당한다고 봤다.
김현빈 기자 hbkim@hankookilbo.com
김민정 기자 fac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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