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도 딱 한 욕만 골라 쓰는 외골수다. 사내의 특기는 낯선 곳에 가서 서열 정리하기다. ‘내 구역’은 내가 정리해야 직성이 풀린다. 짐승 같다고 할까. 오는 26일 개봉할 영화 ‘군함도’에서 배우 소지섭은 조선 건달 최칠성 역을 강렬하게 소화했다. 목욕탕에서 일제 앞잡이 종구(김민재)와 싸우는 격투 장면은 영화의 백미 중 하나다. 수영선수 출신으로 널찍한 어깨와 180㎝가 넘는 훤칠한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매섭다.
‘군함도’는 1945년 일제 강점기 나가사키 인근 하시마 탄광, 섬 모양이 군함을 닮아 군함도라 불리는 곳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25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소지섭은 “호랑이 같은 조선 건달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호랑이 같은 조선 건달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게 무슨 말인가.
“류승완 감독님이 칠성을 호랑이에 비유하더라. 힘 있고 빠르면서 거칠면서 고독한. 기존에 내가 액션 영화를 하긴 했지만, 힘을 쓰는 역은 아니었다. 말과 행동이 빠른 스타일도 아니라 초반에 촬영할 때 고생 했다.”
-목욕탕 격투 신이 격렬하다. 다치진 않았나.
“큰 부상은 없었다. 목욕탕 타일도 진짜 돌이 아니라 충격 흡수를 할 수 있는 소품용 타일이었다. 감독님이 액션 영화를 워낙 많이 찍으셨지 않나. 노하우를 잘 알고 계셔 촬영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초반엔 조선인을 핍박하다가 나중엔 투사처럼 그려진다. 칠성의 캐릭터 변화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칠성은 영화 속에서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건달 행세를 한 것도 자신이 쪽 팔리고 싶지 않아서이지 않았을까. 군함도에서 주변 사람들을 챙긴 건 건달로서의 특성이라고 생각했다. 왜 자기 식구들 챙긴다고 하지 않나. 그래서 움직였다고 본다. 조선 노동자의 영웅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다. 난 오히려 칠성 역을 이해하기 쉬웠다. 누구 보다 살면서 죽을 고비를 많이 넘긴 사람이었을 거다. 살려고 발악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군함도로 끌려간 뒤의 상황에서 그의 극 중 행동에 더 몰입됐다.”
-탄광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6월부터 12월까지 6개월 동안 촬영했다. 강원도에 세트장이 있다. 좁은 공간에서 배우뿐 아니라 스태프들 정말 고생 많이 했다. 힘들었고. 석탄가루는 식용 석탄가루를 썼다. 사람이 들이마셔도 인체에 피해가 가지 않는. 우스갯소리지만 개인적인 난처함도 있었다. 온 몸에 석탄가루를 뒤 짚어 쓰는 건 기본이고 촬영을 하다 보면 손톱까지 석탄가루 분장을 해야 한다. 촬영 후 씻는다고 해도 그게 잘 안 지워진다. 그래서 그 손으로 가게에 가 카드를 내밀 때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더라(웃음).”
-시나리오도 받기 전에 출연 결정을 했더라.
“이번에도 안 하면 감독님이 다시는 나한테 작품 안 줄 것 같았다(웃음). 전에 몇 번 출연 제안이 왔는데 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컸다. 물론 감독님 영화 재미있게 봐 함께 작업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지만. 감독님이 출연 제의 전화했을 때 바로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웬걸, 시나리오 받고 나니 ‘어떡하지’ 싶더라. 일반 상업 영화가 아니지 않나. 게다가 내가 칠성 역을 잘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이 됐다.”
- 6개월을 그것도 열악한 곳에서 촬영하면서 배우들과 전우애가 생겼겠다.
“사실 황정민 선배와 송중기 등과 같이 찍는 장면이 많지 않았다. 황(정민) 선배가 큰 그늘이 됐다. 현장에서 대장이었다고 할까. 에너지 넘치게 이끌어줬다. 현장에서 뭐가 필요한지 잘 아는 선배니까. 난 중간에서 밑에 동생들 밀어주는 정도? 말은 하지 않고 필요한 거 있으면 그냥 가서 해주고. 아, (송)중기는 외모와 달리 ‘상남자’더라(웃음).”
-일본에선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소재다. 현지 활동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는 것에 대한 걱정은 없었나.
“전혀 안 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지를 가장 크게 고민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없는 일을 다룬 건 아니지 않나. 역사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상업 영화다. 난 팬들을 믿는다. 안 그래도 일본 팬들께서 응원을 많이 해주셨다. ‘영화 보겠다’ 부터 ‘열심히 촬영했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영화 촬영하면서 군함도가 지닌 역사적 사실에 대해 만감이 교차했을 텐데.
“고백하자면 군함도에 얽힌 역사를 잘 몰랐다. 영화를 통해 관객들이 한 번쯤은 다시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소지섭은 1997년 드라마 ‘모델’로 연기 활동을 시작해 올해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안방극장과 스크린에서의 행보는 달랐다. 그는 드라마엔 ‘천년지애’를 비롯해 ‘발리에서 생긴 일’과 ‘주군의 태양’ 등 로맨틱한 연애물에 주로 출연했고, 영화는 ‘영화는 영화다’와 ‘회사원’ 같은 선 굵은 액션물에 자주 나왔다. 이력도 특이하다. 청소년 시절에 촉망 받는 수영선수였던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모델 일을 시작했다. 1990년대 유명 의류 브랜드 광고에 출연해 얼굴을 알리면서 배우로 전향했다. 소지섭은 자신이 세운 회사 51K를 통해 해외 다양성 영화를 수입할 때 투자를 하기도 한다. 폼에 죽고 폼에 사는 배우는 간간이 신곡을 내는 래퍼이기도 하다. 소지섭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배우다. 그는 “내가 생각해도 좀 특이한 편”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왜 특이하다고 생각했나.
“생각이 좀 독특하다. 그렇다고 4차원은 아니고. 안전한 길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랩도 안 했을 거다. 힙합 할 때 진짜 욕 많이 먹었다. 팬들도 욕할 정도였으니까. 제일 친한 친구가 배우 송승헌인데, 내가 하는 힙합 듣기 싫다더라(웃음).”
-그런데 왜 랩을 하나.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다. 새로운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촬영하며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니 어떤 평가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18 이어즈’란 노래 가사가 재미있더라. ‘18년 동안 난 혼을 파는 광대. 친근하게 다가가면 소 쿨하고 나이스해. 또 말 안하고 무뚝뚝하면 싸가지 없는 액터. 듣고 싶은 걸 보고 원하는 것만 바라봐’란 대목이. 하고 싶은 말을 랩으로 쏟아내는 느낌이다.
“배우는 주어진 대사를 소화한다. 음악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로 노래할 수 있어 자유로운 면도 있다.”
-벌써 연기를 시작한 지 20년이다.
“특별히 드는 생각은 없다. 작은 바람은 있다. 영화에서 작품으로 신뢰를 주는 배우가 되고 싶다. 내가 그간 작품으로 신뢰를 줬던 배우는 아니었으니까.”
-영화 ‘사도’(2014)에서 정조 역으로 특별 출연했다. 의외였다.
“이준익 감독님이 처음 출연 제의 했을 땐 고사했다. 너무 부담스럽더라. 다른 배우들이 이끌어왔던 이야기와 감정을 마지막에 내가 정리해야 하는 건데... 관객 입장에선 혼란스러울 수도 있고. 극중 배역이 아닌 소지섭으로만 볼 수도 있어 걱정했다. 부담이 컸다. 잠깐 나오지만, 나름 춤 연습도 했다(웃음).”
-‘사도’를 보면서 배역을 선택하는 기준이 바뀐 게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난 캐릭터를 선택할 때 극 중 인물의 비중을 따지지 않는다. 적어도 영화에선. 캐릭터가 좋으면 조연도 상관없다. 예전에 어떤 작품은 내가 조역을 맡으니 나중엔 주연 비슷하게 비중이 올라가더라. 그러면 내 입장에선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
-결혼 안 하느냐는 얘기 많이 듣지 않나.
“(송)중기가 결혼하니 더 궁금해들 하시는 것 같다. 지금은 결혼 생각이 없다. 30대 중후반엔 막 하고 싶었는데 아직 내가 책임감이 부족하지 않나 싶다. 결혼하면 가장으로 한 가정을 이끌어야 하는데, 어려서 자란 환경이 그다지 좋지 않아 더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다.”
-소속사 이름을 51K로 지은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숫자가 51이다. 세상일에 100%는 없다. 결국 반을 넘기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난 항상 51%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K는 ‘킹덤(Kingdom)’의 영어 첫 이니셜에서 따 왔다. 내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취지다.”(소지섭의 오른쪽 팔에는 ‘51K’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덕분에 영화 ‘세일즈맨’을 잘 봤다.(‘세일즈맨’은 51K가 영화사 찬란과 수입해 국내 배급했다. 지난해 프랑스 칸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남자배우상과 각본상을, 올해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영화다.)
“찬란과 함께 한 일이다. 전 살짝 발만 담근 거라고 할까. 역시 좋아서 하는 일이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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