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이민자 인신매매 조직
에어컨 고장난 트레일러 방치
온도 78도까지 올라가 질식사
“反 이민 트럼프 강경책이
목숨 건 밀입국 부추겨”
23일(현지시간) 새벽 멕시코 국경과 인접한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대형 할인마트 주차장에 세워진 트레일러의 문이 열리자 지옥이 입을 벌렸다. 한낮 기온이 섭씨 38도에 달해 에어컨 아래에서도 버티기 힘든 날씨였다. 하지만 트레일러 내부 최고 온도는 바깥보다 두 배나 높은 78도. 말 그대로 ‘이동식 오븐’이나 다름 없었다. 그곳엔 이미 질식해 숨을 거둔 사람들과 열사병으로 쓰러진 이들이 뒤엉켜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 출범 이후 이민자를 가로막는 장벽이 높아지면서 더욱 활개치는 불법 인신매매 조직의 마수에 걸려든 희생자들이다.
CNN 등 미 언론에 따르면 전날 밤 샌안토니오 35번 고속도로변 월마트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대형 트레일러에서 별안간 한 명이 뛰쳐나와 마트 직원에게 물을 달라고 사정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직원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이튿날 트레일러의 문이 열리자 시신 8구와 부상자 31명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부상자들은 즉시 인근 7개 병원으로 나뉘어져 후송됐지만 2명의 애꿎은 목숨이 치료 도중 추가로 희생됐다.
수사 당국에 따르면 희생자들의 피부는 발견 당시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달아 오른 상태였다. 트레일러 냉방장치가 고장 난 데다 찜통 같은 더위 탓에 열사병 등으로 숨진 것이다. 소방당국 관계자는 “피부가 하나같이 몹시 뜨거웠고 부상자 중에는 맥박이 분당 130회 이상 뛰는 이들도 있었다”며 사고 현장의 참혹함을 전했다.
경찰 중간수사 결과 이들은 멕시코, 과테말라 등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불법 밀입국자로 당초 트레일러에는 100여명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구조가 시작됐을 때 상당수는 이미 탈출하거나 인신매매 조직에 의해 넘겨져 일부만 남아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폐쇄회로(CC)TV 확인 결과 앞서 몇 대의 차량이 트럭에 접근, 사람들을 태우고 떠나는 모습이 포착됐다”면서 “인신매매 범죄로 보고 운전자를 체포해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아이오와주 소재 운송 회사 소유인 트럭은 국경을 도보로 넘어 온 이민자들을 태워 몰래 미국 내 모처로 옮기는 중이었다. 국경부터 샌안토니오까지 약 250㎞를 쉼 없이 달려오면서 트레일러에 갇힌 이민자들은 내내 더위와 갈증을 맨 몸으로 견뎌야 했다. 이들이 밀입국을 위해 스스로 트럭에 몸을 실었는지, 납치 후 인신매매 목적으로 감금됐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이번 사고로 ‘텍사스의 비극’은 또 한 건 추가됐다. 사건 발생 지역은 멕시코 국경 누에보 라레도에서 2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데, 불법 이민이나 인신매매 등 밀입국 관련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다. 2003년에는 텍사스 남부에서 휴스턴으로 향하던 트레일러에서 19명이 숨진 채 발견되는, 최악의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운전사가 검문을 피해 차량을 두고 도망가는 바람에 피해자들은 트레일러에 갇혀 속절없이 당했다. 토마스 호만 이민세관단속국 국장대행은 “불법 이민 알선책들은 오로지 돈에만 관심이 있다”며 “사람들이 물도 환풍구도 없는 트레일러를 타고 밀입국하는 건 슬픈 현실”이라고 개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잇따른 밀입국 사망 사고는 가난과 각종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필사적으로 탈출하는 이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직면해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진단했다.
반(反)이민 기치를 내건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책은 위험천만한 밀입국을 한층 부추기고 있다. 유럽 기반 위험 분석 컨설팅업체인 베리스크 메이플크로프트는 “국경 통제를 강화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은 훨씬 위험하고 과감한 밀입국 수법을 자극할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채지선 기자 letmekno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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