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 있어?”
‘증거’는 법률용어로 볼 수도 있지만, 이제는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접하게 됩니다. 교실에서 누군가의 만년필이 없어졌을 때, 평소 그 만년필을 갖고 싶다고 말했던 학생은 범인으로 의심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만으로 그 학생을 범인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학생이 “증거 있냐”고 물어본다면, 추가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의심에 그칠 수 있습니다..
‘최순실 국정농단’ 재판 같은 국민적 관심사안은 만년필 사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증거들이 필요합니다. 언론보도로 그 동안 검찰과 박영수특별검사팀의 수사내용을 들어온 사람이라면, 피고인들 혐의에 부합하는 증거가 차고 넘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 사건의 유ㆍ무죄를 가르기 위해 열린 재판에 들어가 보면, 언론에서 들었던 내용과 증언들이 반드시 증거로 인정되지 않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안종범 수첩’이라든가 ‘정유라씨의 돌발 발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진술조서’ 등은 재판 과정에서 증거로 쓰일 수도 있고, 못 쓰일 수도 있습니다.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 받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겁니다.
안종범 수첩은 증거 맞나
특검이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보좌관을 통해 확보한 업무수첩 39권은 이 부회장 뇌물공여 혐의를 뒷받침하는 핵심 증거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이 부회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독대 메모 등 박 전 대통령 지시사항이 빼곡히 적힌 문건이니까요. 당연히 특검은 재판부에 수첩을 증거로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이 부회장 변호인들은 업무수첩이 증거능력이 없다고 강력 반발했습니다. 특검이 수첩을 안 전 수석에게서 제출 받은 것이 아니라, 보좌관을 통해 얻은 것이므로 확보과정이 적법하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수사기관이 제시한 증거에 대해 피고인이 동의하지 않을 때 증거채택 여부나 증거능력에 대한 최종 결정은 재판부가 하게 됩니다. 어떤 증거가 증명력을 얼마나 갖췄는지는 법관의 자유판단에 달려 있습니다(형사소송법 제308조ㆍ자유심증주의). 다만 증명력을 판단하기에 앞서 증거로 인정받기 위한 요건을 갖췄는지를 우선 따져야 합니다. 같은 법 308조의 2항에 ‘적법한 절차에 따르지 아니하고 수집한 증거는 증거로 볼 수 없다’(위법수집증거 배제법칙)는 규정 때문입니다.
이달 5일 이 부회장 재판을 맡고 있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는 ‘안종범 수첩’에 대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 부회장과의 개별면담에서 안종범 수첩에 기재된 내용대로 대화를 했다는 직접(진술)증거로서의 ‘증거능력’은 인정할 수 없다. 둘 사이에 그와 같은 대화 내용이 있었다는 간접사실로서의 정황증거(간접증거)로는 채택하겠다"고 했습니다. 재판부가 수첩을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로는 보지 않겠다는 의미로, 증거로서 생명력은 얻은 것이죠.
직접증거가 더 우월하다(?)
그런데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재판부가 안종범 수첩을 직접증거가 아닌 간접증거로 본 것을 두고 ‘유력한’ 증거로 본 것이냐, ‘하찮은’ 증거로 본 것이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직접증거는 뭐고, 간접증거는 뭘까요. 예를 들어 살인사건의 경우 현장을 직접 본 목격자나 살인행위가 선명하게 찍힌 폐쇄회로(CC)TV가 있다면 직접증거가 됩니다. 범죄사실을 ‘직접’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피해자 혈흔이 묻어 있는 흉기가 있다면 어떨까요. 살인사건 정황을 알려주는 단서, 즉 간접증거가 됩니다.
이 부회장 재판에 대입해 보면 당시 독대에 참여한 사람의 생생한 증언이나 대화내용이 녹음된 영상 정도가 직접증거가 될 겁니다. 하지만 영상도 없고, 당사자들은 혐의를 모두 부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대 이후 박 전 대통령 지시가 적힌 수첩이 있다면 당연히 간접증거가 됩니다. 안 전 수석도 자신이 기재했다는 사실은 법정에서 인정했습니다. 어찌 보면 재판부가 명백히 간접증거인 것을 간접증거로 보겠다고 밝힌 것에 불과하죠.
그렇다면 간접증거이기 때문에 재판에서 가치가 떨어질까요. 뇌물 사건에 능통한 한 판사는 이런 의견을 줬습니다. “뇌물 사건 관련자 전원이 혐의를 인정하지 않는 한 모든 증거가 간접증거일 수밖에 없다. 직접증거든 간접증거든 증명력 자체에는 우열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어떤 증거가 채택되는지도 중요하겠지만, 결국은 재판 과정에서 나오는 법정진술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정유라 법정진술 증거능력 있나
법정진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지만, 그렇다고 모든 진술이 증거능력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이달 12일 이 부회장 재판에 나온 정유라씨의 발언을 예로 들겠습니다. 정씨는 법정에 출석해 “삼성이 말 세탁 과정을 몰랐을 리 없다”고 했습니다. ‘최순실씨가 독일에서 말들을 교환(말 세탁)한 사실을 삼성은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던 이 부회장 측 주장과 배치되는 새로운 증언이죠.
그런데 정씨 발언은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은 내용을 진술한 ‘전문증거’라고 봐야 합니다. 정씨에 따르면 정씨가 독일에 있는 승마코치에게 전화해서 말 세탁 과정에 대해 물어봤고, 승마코치가 ‘말 교환 전날 최순실씨가 삼성 관계자들과 만났다’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형사소송법 제310조에 따르면 전문증거는 증거가 될 수 없으니 정씨 진술은 증거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일단 ‘참고사항’으로만 기억될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예외가 있습니다. ‘원진술자가 사망, 질병, 외국거주, 소재불명, 그 밖에 이에 준하는 사유로 인하여 진술할 수 없고, 그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하에서 행해졌음이 증명된 때에는 이를 증거로 할 수 있다’(형사소송법 316조). 법 조문에 나온 ‘원진술자’가 이 경우엔 독일에 거주하는 승마코치라는 점에서 향후 증거능력을 갖출 수도 있습니다. 물론 판단은 재판부 몫입니다.
증인을 왜 끊임없이 부를까
법정 증언 못지 않게 중요한 게 또 있습니다. 수사기관(검찰) 조사 단계에서 참고인들이 진술한 ‘진술조서’입니다. 검찰이 기소 전에 해당 사건의 혐의를 입증해줄 참고인들을 불러 진술을 듣고 기록한 문서입니다. 하지만 검찰에서 작성된 진술조서가 재판에서 모두 증거로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피고인이 특정 진술조서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면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는 조항(형사소송법 318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도 생깁니다. ‘피고인 측에선 불리한 조서에는 당연히 동의하지 않을 텐데, 그럼 수사기관은 헛수고를 한 거 아니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진술한 사람을 법정으로 직접 불러 ‘본인이 말한 것이 바르게 기록된 게 맞는지’를 확인하는 진정성립 절차를 밟으면 해당 조서가 증거능력을 얻게 됩니다.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의 뇌물사건 재판처럼 양측 공방이 팽팽한 경우, 피고인은 자신에 불리할 내용이 담긴 조서에 동의하지 않으려 합니다. 두 재판에 증인이 수십 명씩 나오고 있는 이유도 그만큼 피고인이 동의하지 않은 조서가 많기 때문입니다. 증인을 일일이 법정에 불러야 하는 만큼 재판도 더 길어지겠지요. 종종 재판 도중 피고인이 입장을 바꿔 특정인의 조서에 동의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예정됐던 증인신문은 철회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참고인이 재판에 나와 진정성립에 불응하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해당 재판의 증거로 쓸 수 없습니다. 이달 10일 박 전 대통령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 부회장은 검찰 수사 때 작성된 조서의 ‘진정성립’을 묻는 질문에 진술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러자 ‘진정성립’을 묻는 질문에도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는 게 가능하냐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재판부는 결국 “검찰 조서의 진정성립 여부도 증언 거부 대상이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박 전 대통령 재판에선 이 부회장의 검찰 조서는 영영 증거로 쓰일 수 없게 된 겁니다.
김현빈 기자 hb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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