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 ‘막 하자는 거죠’ 연상시켜
적폐 청산은 정권 초면 늘 하는 일
검찰 힘 빼기보다는 인권보호 우선
취임한 지 보름도 안 된 2003년 3월 노무현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대화가 열렸다. “대통령께서는 취임 전에 부산 동부지청장에게 청탁전화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쯤 가면 막 하자는 거죠.” 민주당 경선과정에서 잠시 기사화 됐고, 대선국면에선 논란조차 되지 않은 문제를 검사들이 맞짱 뜨듯 거리낌없이 제기한 이 장면은 두고두고 검찰과 정권의 긴장관계를 대변했다. 이후 검찰의 대통령 주변 수사가 수 차례 반복된 것은 권력이 처음부터 얕보인 때문이란 지적이 많았다. 퇴임한 그는 결국 2009년 4월 대검 중수부에 불려 나간 뒤 달포가 되지 않아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2017년 6월, 막 출범한 문재인 정권에서 검찰이 청와대에 결기를 보인 사건이 다시 벌어졌다. 커튼 뒤에서 진행된 사건의 경위는 정확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검찰 쪽에서 청와대 민정 사람들의 뒤를 밟았다고 한다. 대기업의 법인카드를 받아 쓰고 다닌다는 첩보에 따라 민정 사람들이 식사한 곳의 신용카드 매출 전표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 첩보는 사실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수사기관의 정당한 절차로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권력의 힘이 가장 센 정권 초, 그것도 코앞의 검찰개혁을 이끌 민정 사람들의 뒤 캐기를 단순 첩보 확인 수순으로 보는 이는 드물다. 더욱이 범죄정보 수집은 검찰 권한 가운데 법률로 보장된 것이 아니어서 적법성 논란에 휘말려 있다.
그럼에도 정권의 힘이 시퍼런 때에 검찰이 보인 태도는 서늘함을 느끼게 한다. 정권이야 선출된 5년짜리 권력에 불과하지만, 검찰은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권력인 때문이다. “이쯤 가면 막 하자는 거죠”란 노 전 대통령의 발언 장면이 오버랩 될 수밖에 없다. 아직 검찰 여러 곳에 ‘우병우 사단’이 포진해 움직이면서 드러난 현상으로 의심된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래저래 청와대와 검찰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흐르는 건 사실처럼 여겨진다.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개혁’에서 드러난 검찰 개혁은 그 힘을 빼는 데에 맞춰져 있다. 힘을 떼어내 경찰에 주든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신설해 그 힘을 분산하는 식이다. 그러나 경찰에 수사권 일부를 주어도 기소권을 쥔 검찰이 경찰을 통제할 수단은 많다.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역시 검사가 운용하게 돼, 검찰의 힘은 외관상 쪼개져 있을 뿐이다. 여의도 국회를 바라보면 이런 개혁마저 쉽지는 않아 보인다. 여소야대 구도에서 법 개정까지 수많은 시간과 논란이 필요하고, 과거 정부들은 그 벽을 넘지 못했다. 더군다나 국정 제1과제로 제시된 적폐청산은 검찰에 달려 있다. 대통령이 사정기관 장들이 모두 참석하는 반부패협의회를 부활시켜 전방위 사정에 시동을 걸었지만, 많은 부분은 검찰에 기대야 하는 현실이다.
문재인 정부는 진보정권이다. 진보는 어디에서 시작되는 걸까. 불의를 찍어내는 적폐 청산, 전방위 사정으로 현실 속 그림자를 지울 수는 있다. 적폐에 메스를 대는 것은 모든 정권들이 취임 초 해야 할 목록인 ‘투 두 리스트’에 속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것으로 깨끗한 나라, 정의가 바로선 나라가 되지는 않았다. 방향을 틀어 국민의 인권을 높이는 개혁이라면 진보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가 자유, 인권을 확대하는 데 있다면 그 연장선에서 개인의 인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수사기관을 개혁하는 게 먼저다. 가령 ‘정유라 금지법’은 어떨까. 아무리 비선실세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밉다 해도 구속 영장을 청구, 재청구하고 다시 불러 세 번째 영장을 칠 듯 압박하는 것은 개인 인권에 반한다. 인권의 기준에서, 검사가 처음부터 모든 혐의를 훑은 뒤 가장 주된 것을 이유로 영장을 청구한 결과가 기각이었다면 그것으로 끝이어야 했다. 정유라가 새벽에 출두해 최순실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보쌈증언 논란이 맞는다면, 특검은 더 큰 공정함과 신뢰를 잃은 것이 된다. 정유라의 인권마저 보호한 수사라면 그 결과는 공허하지 않을 것 같다.
이태규 뉴스1부문장 tg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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