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에서 왕수석으로 불린 박재완 국정기획수석은 경차인 모닝을 관용차로 타고 다녔다. “녹색성장 주무 수석으로서 모범을 보이고 싶었다”고 한다. 그의 아이디어로 다른 수석도 베르나와 아반떼 하이브리드를 탔다. 불편하고 품위가 손상된다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박 수석 차량이 과천정부청사 VIP존으로 들어갔다가 경위에게 혼난 적도 여러 번이다. 당시 서울시내 호텔에는 모닝과 베르나 경계령도 내려졌다. 도어맨이 경차와 소형차를 무시했다가 뒷자리에서 내리는 수석을 보고 깜짝 놀라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 통상 장관급은 3,800㏄ 제네시스 EQ900을, 차관급은 3,300㏄ K9이나 체어맨을 탄다. 법적으로 관용차 등급이나 배기량에 장ㆍ차관 직급별 제한은 없다. 공용차량 관리규정은 ‘차관급 이상 공무원은 국가가 제공하는 관용차를 탈 수 있다’고만 돼 있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규제 완화를 이유로 관용차 선택을 해당기관 자율에 맡겼다. 하지만 국민권익위원회는 2012년 ‘관용차 배기량은 행정안전부 가이드라인을 참조해 대형화를 자율적으로 억제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행안부 가이드라인은 장관급 3,300㏄, 차관급 2,800㏄다.
▦ 박근혜 정부는 가이드라인을 무시했다. 대다수 장관이 3,800㏄ 검정색 에쿠스를 탔다. 일부 장관은 교체시기에 맞춰 3,300㏄ 관용차를 3,800㏄로 업그레이드했다. 박승춘 전 보훈처장 등 일부 차관급도 3,800㏄ 에쿠스를 탔다. 황교안 전 총리는 가격이 1억5,000만원 대인 5,000㏄ 에쿠스 리무진을 탔다. 위계질서가 엄격한 국방부는 예외 없이 대장이 에쿠스, 중장은 체어맨, 소장은 그랜저(2,400㏄), 준장은 K5(2,000㏄)를 탄다. 대검은 총장이 에쿠스, 차장이 체어맨, 부장이 그랜저다.
▦ 김현미 국토부 장관이 전임 강호인 장관이 타던 현대차 투싼 수소차를 관용차로 선택했다. 앞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고 환경도 생각하겠다”며 2,000㏄ 쏘나타 하이브리드를 관용차로 골랐다. 관가나 국회의 검은색 대형차 행렬은 해외에선 보기 힘든 권위주의 시대 유물이다. ‘지하철 타는 장관’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국회의원’ ‘경차 타는 시장’을 보고 싶다. 바쁘다는 건 핑계다. 버스나 자전거로 이동하며 시민들과 부딪칠 때 생활 밀착형 정책도 나오는 법이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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