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에서 언젠가 ‘윤리적인’ 육식이라는 문구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 동안 윤리적인 이유로 채식을 실천하는 이야기를 해왔는데, 윤리적인 육식이라니. 윤리적 채식의 오타가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오타가 아니라면 ‘착한 악마’나 ‘작은 거인’처럼 형용 모순은 아닐까. 하지만 채식주의자들 중에서 윤리적인 육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부류도 있다.
일단 윤리적 육식을 가능하게 하는 건 인공 고기, 다시 말해서 실험실에서 배양한 고기를 먹는 것이다. 이 실험실 고기도 동물성도 있고 식물성도 있다. 동물성 고기는 소나 돼지로부터 분리된 조직세포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해 이를 실험실에 배양해서 고기를 만드는 것이다. 식물성 고기는 식물에서 단백질이나 지방과 같은 영양소를 추출해서 고기를 만든다. 식물성 고기는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햄버거 패티로도 어느 정도 보급이 되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고기는 아니고 고기에 가까운 맛을 내는 식품이다. 이에 견주어 동물성 고기는 정말로 고기인데, 문제는 현재 기술로는 500g에 1,000만원 정도로 어마어마한 생산비가 든다는 데에 있다. 이 생산비가 합리적인 수준으로 낮아진다면 고기를 만들기 위해 희생되는 가축들, 가축을 기르기 위해 훼손되는 환경을 고려할 때 윤리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윤리적인 이유로 채식주의자가 된 이들이 채식을 하면서 가장 고려하는 것은 바로 동물을 열악한 환경에서 기르고 끔찍한 고통을 주면서 도살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요인을 제거하면 윤리적인 육식도 가능하다. 다시 말해 동물의 본성에 적합한 환경에서 가축을 사육하고 고통을 주지 않게 도살한다면 그 고기는 먹어도 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인간도 친인간적인 환경에서 사육하고 고통을 주지 않게 도살을 하면 먹어도 된다는 결론이 나올까? 여기서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결정적인 차이가 개입된다. 인간은 자존감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고급스러운 환경에서 사육된다고 하더라도 사육된다는 것 자체에서 굴욕감을 느낀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주변 환경을 인지하고 앞날을 계획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고통 없이 도살하더라도 도살된다는 것 자체에 대해 공포감을 느끼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좌절되고 만다. 그러므로 인간의 경우에는 아무리 인도적인 사육과 도살을 한다고 하더라도 고기로 먹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반면 인간과 같은 자존감이나 인지 능력이 없는 가축의 경우에는 사육과 도살 과정의 고통을 없앤다면 고기로 먹는 것이 윤리에 어긋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 조상들은 각 가축의 천성에 맞게 기르면서 윤리적으로 고기를 먹어 왔다. 최대한 고통 없이 도살하려고 했지만 기술의 부족으로 어느 정도의 고통은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현대의 공장식 농장에서 평생 겪어야 하는 고통을 생각한다면 그 고통은 한 순간일 뿐이다. 이제 기술의 발달로 고통 없는 도살도 가능하다. 그러나 사육 과정에서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공장식의 밀집 사육을 더 이상 유지해서는 안 되는데, 그러면 지금보다 훨씬 비싸게 고기를 사먹어야 한다. 윤리적인 육식이 가능하긴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고기를 훨씬 덜 먹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닭고기를 먹는 것보다 고래 고기를 먹는 것이 훨씬 윤리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고래 한 마리에 해당하는 양의 닭고기를 얻기 위해서는 닭 수백 마리(내지 수천 마리)가 희생되어야 하지만, 고래는 한 마리만 희생되면 되기 때문이다. 고통의 양을 생각할 때 그게 훨씬 윤리적이라는 것이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옥자’는 유전자 조작된 슈퍼 돼지가 주인공이라고 한다. 순전히 고통의 양만 생각한다면 돼지 여러 마리가 희생되는 것보다 슈퍼 돼지 한 마리가 희생되는 게 낫다. 그러나 ‘옥자’는 인간과 비슷한 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이왕 유전자 조작한 바에 현재 돼지(돼지는 인지 능력이 상당히 높다)보다 고통 감수 능력과 인지 능력이 상당히 떨어지는 돼지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최훈 강원대 교수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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