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정치인에게 야망은 ‘금기’였다. ‘남성의 여의도’가 강요해온 문법이다. ‘가부장 정당’인 보수당이 더 심한 건 말할 것도 없다. “여성 의원을 다급하게 찾을 때는 기념 촬영할 때뿐”이라는 블랙 코미디 같은 말이 달리 나온 게 아니다.
“니는 시끄럽게 만날 반대만 하지 말고 조용히 좀 있그라.”
2009년 재선 시절의 이혜훈 의원이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에게 들은 꾸지람을 농담처럼 들려준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국회 기획재정위원이었다. 여당과 상의조차 없이 정부가 대규모 추가경정예산안을 내겠다고 하자, 원내지도부를 쫓아가 내용과 절차와 효과를 따졌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이 그랬다는 거다. 그 원내대표가 그 당(자유한국당)의 대표가 된 지금, 그때 그 한마디의 의미가 더 풍부하게 해석됐다. 여성 의원을 바라보는 남성 대표의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아서다.
‘너’라는 말에선, 여성 의원을 어린 사람 내려보듯 하는 시선이, ‘시끄럽게’라는 대목에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이제는 용도 폐기된 속담이 연상된다. ‘조용히 있어라’는 ‘들러리나 하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지나친 걸까. 그래서 이 문장은 “모름지기 여자라면 조용히 지도부의 지시나 따를 것이지, 자꾸 목소리를 내서 당을 시끄럽게 하느냐”는 말로 통역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에게 ‘반대’는 미덕이다. 내부를 향한 반대는 특히 그렇다. 알아야 반대도 하며, 제대로 반대해야 대안도 나온다. 민심이 아닌 권력이 잣대인 반대는 누구보다 국민이 바로 알아본다. 그래서 반대는 선거라는 링 위에서 상대와 치열하게 맞붙을 수 있는 원동력이다.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도 ‘아니오’를 인정하지 않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예’ 밖에 모르는 ‘간신’만 곁에 두다 그는 괴물이 됐고 온 국민이 다 아는 잘못을 혼자만 모르는 파면 대통령이자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 있다.
반대하는 여성 의원을 가부장의 당이 터부시하는 건 아마도 야망이 느껴지기 때문일 거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때로는 싸움도 마다 않는 적극적 여성 의원들을 “드세다”는 말로 편 가르는 남성 의원들을 여럿 봤다.
그래도 그는 여성 의원의 반대에 특히 반대하는 그 당에서 반대를 무서워하지 않아 살아남았다. 2007년 대선 때는 대세 이명박 후보에 반대해 박근혜 캠프로 갔다가, 다시 박근혜의 독선에 반대해 입바른 소리를 하다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국정농단의 실체가 드러나는데도 탄핵에 동참하지 못하는 친박의 여당에 반대해 탈당까지 감행했다.
보수의 위기가 생물학적인 성만 여성인 가부장에서 시작됐기에, 오히려 보수의 개혁을 여성이 이뤄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성 대통령의 탄핵으로 저잣거리에서조차 “이제 여자가 대통령이 될 수 있겠어?”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현실에서 보란 듯이, 진짜 여성의 정치란 이런 것이라고 증명했으면 좋겠다. 재선이나 된 여성 의원이 자신이 왜 정치하는 줄 깨닫지 못하고 여성을 계급화하는 실언을 내뱉어 동료 여성 의원들의 얼굴에 몽땅 구정물을 끼얹은 때라 더욱 그렇다.
그래서 지금은 바른정당 대표가 된 이혜훈의 눈에서 권력 의지가 더 이글이글 불타올랐으면 좋겠다. 진보, 보수를 통틀어 3선 이상 여성 의원이라고는 달랑 11명으로 쪼그라든 엄혹한 정치 현실에서 살아남은 생명력으로 야망을 더욱 업그레이드 했으면 좋겠다.
바른정당에서는 이혜훈이, 정의당에서는 심상정이 우뚝 서 훨씬 성능이 향상된 좌우의 날개로 펄펄 나는 정치를 보고 싶다. 그래서 북유럽의 어느 정치 선진국처럼 “엄마, 남자도 대통령이 될 수 있어요?”라는 얘기는 나오지 못할 망정, 정치는 여자가 더 잘한다는 칭찬이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후진적인 한국정치가 한걸음 더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이런 ‘편파적’ 칼럼을 쓰는 이유다.
김지은 정치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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