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탈원전 선언 이후 높은 긴장감이 있는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은 신고리 원전 5, 6호기의 공사 중단 여부를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 산업부의 행정지도 및 한국수력원자력 이사회를 통해 결정하는 과정에서 여실히 나타난 바 있다. 이 문제를 바라보는 여러 철학적 관점이 있겠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생태주의(ecologism)와 효용주의(utilitarianism)를 생각해볼 수 있다.
생태주의 안에서도 생태낭만주의, 생태합리주의 등과 같은 여러 분파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생태주의는 원자력 안전을 포함한 환경문제에 있어서 인간 중심의 사고가 아니라 전체적인 생태의 한 구성요소로서 인간의 존재의미를 이해하는 관점이다. 이 관점을 따르는 경우 원자력 발전을 지속할 것인지 여부는 그것이 생태적으로 바람직한 인간의 삶의 모습인지에 대한 윤리적인 혹은 규범적인 평가를 거쳐서 이루어진다.
반면, 효용주의는 철저하게 인간 중심주의적인 관점이다. 이 관점을 따르는 경우 원자력 발전을 중단해야 한다거나 혹은 보다 환경친화적인 정책이 채택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당위는 그와 같은 선택으로 인해 현재 세대 혹은 미래 세대 인류가 누리게 되는 효용(utility)의 합이 그렇지 않은 선택을 했을 경우에 비해서 더 크다는 점을 통해서만 뒷받침된다.
각 개인의 입장에서 에너지환경문제를 대함에 있어서 어느 철학적 관점을 택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그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영역이다. 그 선택으로 인해 공동체 전체 혹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전제만 충족된다면 말이다. 그러나 국가 혹은 공동체 전체 차원에서 어떤 에너지정책 혹은 환경정책을 선택할 것인지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철학적 관점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최근 탈원전 찬성과 반대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대립적인 논쟁은 그 발화성 높은 주제의 예민함에 더해 전제 되는 철학적 관점에 대한 혼선과 오류로 인해 끝없는 미궁으로 빠져드는 양상이다. 탈원전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그 주장이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원전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생태적으로 더 바람직한 것이라는 취지인지 아니면 여전히 효용주의적 관점에서 원전이 없는 세상이 더 바람직하다는 취지인지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탈원전 정책으로 인해 효용주의적 관점에서 발생하게 되는 여러 종류의 사회적 비효용 및 사회후생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원전이 존재하지 않는 형태의 삶이 생태적으로 더 바람직한 것이라는 점에 대한 철학적 주장과 논증이 있어야 한다. 또한, 그 철학적 주장과 논증이 단순히 개인차원의 삶의 모습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 전체의 합의된 사회선호 함수로서 채택될 수 있음에까지 이르는 것이어야 한다.
반면, 후자의 경우라면 원전의 지속으로 기대되는 비효용의 값이 그로 인한 효용의 값을 압도하고 남음이 있음을 과학적으로 주장하고 입증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우리나라 상황에서 원전의 사고 확률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되는지, 그 사고확률이 실제로 현실화되었을 때의 기대손해값이 얼마나 되는지에 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또한, 원자력발전과 석탄화력발전을 장기적으로 중단한 상황에서 신재생에너지 그리고 가스발전만으로 안정적인 전력수급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그로 인한 환경적 편익을 고려한 사회적 총편익의 합이 그 결정으로 인한 사회적 총비용의 합보다 크다는 점에 대한 경제적인 설득이 있어야 한다.
만약, 그 설득에 실패하거나, 분석된 사회적 총비용이 사회적 총편익에 비해서 더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원전이 바람직하다는 취지의 주장이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탈원전이 생태적으로 더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라는 취지의 철학적 관점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합의될 수 있는 철학적 관점인지 여부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 과정과 합의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허성욱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