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이 “행복을 찾아서 퇴사하겠습니다”는 글과 함께 여행사진을 올렸다. 그녀의 표정은 밝아 보였고, 비슷한 시기에 퇴사한 친구와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행복을 찾아서 퇴사하겠다는 문구 때문이었는지, 여행에 대한 부러움 때문이었는지, 그날 이후 퇴사에 관심이 생겼다.
서른이 넘어 취직하고, 이제 갓 6개월이 넘은 나에게 퇴사란 입사와 동시에 마주한 숙제였다. 자유롭게 시간을 배치하고, 주도적인 삶을 살았던 나는 시간 통제가 업무에 대한 부담보다 더 컸다. 고용노동부의 ‘표준취업규칙’을 보았을 때는 말문이 막혔다. 초기 2년 동안 노동자가 쓸 수 있는 휴일은 15일. 이것이 한국의 표준취업규칙이니, 정말 우울했다.
한국의 노동시간은 OECD 회원국 중 2위로 평균 2,113시간(2015년 기준)이다. OECD 평균 1,766시간에 비하면 약 40일 넘게 더 일하는 셈이다. 일하는 만큼 임금이 높은 것도 아니다. 실질임금은 3분의 2수준이다. 결과적으로 더 많이 일하고, 더 적은 임금을 받는다. 일하는 시간이 길수록 일터에 얽매여 있는 시간이 많고, 모든 생활이 직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일 중독자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소 지난 설문이지만, 2014년 취업포털 인크루트에서 직장인 817명을 대상으로 퇴사압박 경험에 대한 설문을 한 결과 응답자 중 31.1%가 퇴사 압박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압박을 받은 이들 중 76.4%는 결국 퇴사했다. 응답자들은 회사의 재정적 어려움과 조직 개편, 업무 효율에 따라 퇴사 압박을 받았다고 했다.
회사는 위기일수록 노동자에게 더 강도 높은 성과압박과 헌신을 요구한다. 끊임없이 자기 증명도 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이곳에 필요한 사람인지, 단순히 열심히 일하는 것을 넘어 수익창출이라는 가시적 성과도 보여야 한다. 그러다 보니 노동자는 일에 헌신하거나 퇴사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런 흐름에서 ‘퇴사’가 직장인들 사이에서 새로운 문화로 등장한 것은 신기할 일이 아니다. 자기계발서 대신 퇴사 관련 서적을 읽고, 퇴사학교에 간다. 얼마 전 방영한 ‘SBS 스페셜: 퇴사하겠습니다’는 일본 언론에서 오랫동안 일한 이나가키 에미코(<퇴사하겠습니다> 저자)의 퇴사 이후 삶을 조명하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퇴사 담론이 소비되는 방식은 ‘돈’만 보고 쫓아온 삶에 대한 반성에서 더 이상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 삶의 태도로의 변화에 있다. 또 무작정 퇴사를 할 것이 아니라, 퇴사를 준비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찾아가고 알아간다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퇴사 원인이 일터에 있음에도 조직이나 노동환경에 대한 변화가 아닌, 개인에게 문제 원인을 돌리고 해소하도록 종용한다.
노동자의 권리 중 하나는 일을 중단하겠다는 선언이다. 파업할 수 있는 권리는 강력한 정치적 표현이다. 그러나 개인의 퇴사는 성과급, 평가 시스템, 폭력적인 조직문화 등을 바꾸지 못한다. 높은 실업률은 고용자에게 늘 대기 중인 산업예비군이 있다는 안도감을 주기 때문에 퇴사가 노동구조에 위협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버티다가 소진되어 가까스로 제 몸을 건사하기 위해 나오는 것이 오늘날 퇴사자들의 모습이다.
퇴사는 개인의 선택일 수 있지만, 퇴사를 강요하는 노동환경은 선택이 될 수 없다. 하루에 한 시간, 일 년에 한 달, 노동자 일하는 시간을 줄인다고 해서 업무에 큰 지장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기껏 일을 가르쳐놨더니 퇴사하더라’는 고용주들의 볼멘소리는 자기변명일 뿐이다. 일하는 사람이 안정적으로 자기 삶을 보살피고 장기적 전망을 그리는 일은 충분한 휴식과 일터 바깥에서 삶을 찾을 때 가능하다. 더 이상 시간을 착취하는 것이 노동의 표준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천주희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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