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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사도세자(7월 12일)

입력
2017.07.1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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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어진. 우승우 화백이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사도세자의 어진. 우승우 화백이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과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 이선이 1762년(영조 38년) 7월 12일 창경궁 휘령전(현 문정전) 앞뜰 뒤주에 갇혀 숨졌다. 왕세자였던 그가 왕의 명으로 세자 신분을 박탈 당하고 서인 신분으로 뒤주에 갇힌 건 7월 4일이었다. 그 해 7월의 일기가 지금처럼 무덥고 습했다면 그는 탈수와 일사병으로 며칠을 버티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궁인들은 처음 며칠 동안은 음식물도 넣어주곤 했고, 영조의 불호령이 내려진 뒤로는 뒤주를 봉한 채 매일 한 번씩 흔들어 그의 생사를 확인했다고 한다. 12일은 그의 사망 사실이 확인된 날짜다. 사인은 굶주림으로 적혀 있다. 엽기적인 대목이 적지 않은 왕조 실록 중에서도 가장 엽기적인 한 장이 그렇게 끝이 났다.

그는 1735년 2월 후궁 선희궁 이씨에게서 태어나 생후 1년 만에 원자(元子)에 봉해졌다. 적장자 효장세자를 일찌감치 잃은 영조는 만 41세에 얻은 아들을 무척 엄히 대했다고 한다. 사소한 잘못에도 불호령을 내리기 일쑤여서 이선은 다혈질의 강한 군주였던 영조를 두려워했고, 왕 앞에서 기절을 한 적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영조는 수명도 무척 길었다.

세자의 악행은 10대 중반부터 본격화했다. 왕에게서 받은 중압감을 나인과 내관 등에게 풀곤 했는데, 그 행태가 고문과 살인이었다. 그렇게 목숨을 앗은 이가 족히 100명에 이르고, 그 중에는 자신이 사랑했던 후궁도 포함됐다. 발작이 잦았고, 광증이 있었으며, 특히 옷을 귀신으로 여겨 옷 입기를 두려워하는 의대증 증상을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2014년 울산대 의대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의료진이 한중록을 근거로 그가 심한 양극성 장애(조울증)를 앓았으리라 진단했다.

영조가 극단적인 명을 내린 배경을 두고는 설이 분분하다. 탕평책을 펴긴 했지만 말년의 영조는 노론을 중용했다. 반면 사도세자의 성향은 소론 쪽이어서, 집권 세력의 음모에 희생됐다는 설이다. 사도세자가 반역을 기도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가장 도드라진 것은 그의 악행이 도를 넘었다는 거였다. 다만 영조가 그 전에 그의 악행을 알아 치죄한 적이 있다는 기록은 없다.

그의 아들 정조를 비롯, 영조 이후의 조선의 모든 왕들이 사도세자의 후손이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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