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에 은폐된 유화 둘러싼
비밀 탐색하는 과정을 그려
추리탐정 장르 문법 따르면서
혼성장르로서 소설 묘미 잘 살려
불필요한 성애적 묘사 반복과
작위적 인물 설정은 아쉬워
※하루키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가 12일 국내 출간됩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1,2권으로 나눠 발간되는 신작은 초판 5만 세트를 찍을 만큼 출판계 큰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국내 출간에 맞춰 일본에서 출간된 원어판을 이명원 문학평론가가 미리 읽어보았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는 혼성장르로서의 소설의 묘미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표제가 된 ‘기사단장 죽이기’는 유화다. 소설 속에서 거듭 탐구되는 비밀로 가득찬 인물은 야마다 도모히코라는 화가인데, 그는 전후 일본 미술계에서 일본화의 거장으로 입신했지만, 기묘하게도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의 고립된 작업실의 다락방에 숨긴 채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죽어가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유화를 둘러싼 비밀을 탐색하는 과정이 소설의 중심 플롯인데, 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서술자인 ‘나’와 비밀스러운 과거를 갖고 있는 멘시키라는 인물이다. ‘나’는 미대출신의 36세 남성으로 생활의 압박 때문에 장식용 초상화를 그리는 소외된 노동에 함몰되어 있다. 작품은 그리지 못하고 상품만 제작한다는 열패감에 빠져 있는 인물이다. 6년간 결혼생활을 유지했던 아내 역시 어느 날 돌연 그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인생이 파산되었다고 절망한 ‘나’는 낡은 차를 끌고 발작적으로 집을 나와 홋카이도까지 올라갔다가 대학동창의 도움을 얻어 가나가와 현의 오다와라 산정에 있는 도모히코의 작업실에 거주하게 된다. 미대 동창이 도모히코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마을의 주민 대상 미술교실에서 강사로 일하지만, 이제 더 이상 초상화 따위는 그리지 않고 진정한 작품을 완성하겠다고 결심한다.
이전부터 ‘나’는 도모히코에 대해 의혹을 갖고 있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학했던 그가 1938년 석연치 않은 이후로 일본으로 돌아온 이후 1947년까지 침묵, 이후 일본화로 전향한 내적 원인이 궁금했던 것이다. 이런 의문을 품고 있는 상황에서 우연히 다락방에서 발견하게 된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로테스크한 그림은 ‘나’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킨다. 일본 나라시대의 의상을 입은 두 남자가 이 그림에 담겨 있다. 검은 옷을 입은 청년 검객이 흰 옷을 입은 노인을 칼로 찌르는 순간을 재현하고 있는데, 청년의 얼굴은 차갑고 무표정한 데 반해, 노인의 얼굴은 고통과 놀람으로 일그러져 있다. 이것을 바라보는 한 여자의 절규하는 표정과 땅 속에서 반쯤 얼굴을 드러낸 설명할 수 없는 남성의 모습은 ‘나’를 전율시킨다.
왜 이 그림은 발표되지 않고, 저 깊숙한 다락방에 은폐되어 있었을까. 산정에 살고 있는 또 다른 남자 멘시키는 ‘나’와의 만남을 통해 그 비밀을 탐색하고 폭로하는 파트너의 역할을 한다. 도모히코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공부하던 시절은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고 병합한 시점임과 동시에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관동대학살을 자행했던 때이다. 이 시기에 도모히코는 오스트리아인 애인과 함께 독일 점령세력을 암살하는 지하조직의 단원으로 활동했다. 암살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일본 외무성에 의해 그는 구사일생으로 일본으로 귀환하지만, 그의 애인은 절멸수용소에서 죽음을 당한다.
또 하나의 비극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그의 동생 야마다 쓰구히코가 징집되어 중일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전쟁과정에서 그는 관동대학살을 포함한 일본군의 무차별적 살육에 가담하게 되는데, 이후 일본으로 돌아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나’와 멘시키는 이러한 일련의 은폐된 가족사가 도모히코로 하여금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기묘한 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추론한다. 이 추론의 과정이 소설의 중심서사를 전개시키는 동력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전전 일본과 독일의 군국주의를 고발하고 있는 작품은 아니다. 작가의 가치판단 역시 과거사를 증언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 가운데, 어떤 태도가 타당한가 하는 물음 앞에서는 침묵의 진정성이라는 모순 쪽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 같다. 이 애매성이야말로 일본적 반성의 최대치이자 명백한 한계일 것이다.
이 소설은 위에서 거론한 추리탐정 소설의 장르문법과 함께, 교양소설과 예술가 소설, 성애소설로서의 면모도 중층적으로 보여준다. 서술자인 ‘나’가 화가이기 때문에, 회화에 대한 다채로운 사유들이 개진되고, 그림을 그릴 때 배경음악으로 발성되는 독일 고전음악의 레퍼토리에 대한 해석 역시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썩 고양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루키 소설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상실된 사랑의 대상이나 죽음 역시 이 소설에서도 중요한 모티프로 나타나는데, 가령 ‘나’가 죽은 누이에 대한 승화되지 못한 애도의 감정으로 아내를 포함한 여러 여성 인물들과 섹스라는 매개를 통해 유랑하는 것이 그러하다. 그것은 이 소설에서 ‘나’와 동류감각을 공유하고 있는 멘시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막상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가장 아쉬운 것은 실제로 ‘나’에게 나타나 대화를 지속하고 있는 ‘기사단장’이라는 인물의 작위성이다. 또한 새벽이면 저 깊은 땅 속에서 들리는 방울소리 역시 소설의 초반부에서는 자못 호기심과 긴장감을 주지만, 결과적으로는 별다른 서사적 기여를 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하루키는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너무 많은 장르를 혼합하고, 동시에 불필요한 성애적 묘사를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는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한 상념까지 피력하는데 이는 명백하게 작위적인 결말처럼 보인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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