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 기막히지 않습니까.”
2014년 연말쯤으로 기억한다. 군 고위관계자는 점심 자리에서 으스대며 이렇게 떠들었다. 2009년에서 2012년, 다시 2015년으로 늦춰진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시점이 2020년대 중반으로 사실상 무기한 연기되면서 우리 군의 의지와 작전능력에 의구심이 커지던 시점이었다. 전작권 전환을 미루는 대신 숨겨둔 특단의 대책이라도 있나 싶어 물어봤지만, 답은커녕 ‘조건에 기초한’이라는 요상한 표현을 자랑하기에 바빴다. 국방부 장관에서 청와대로 자리를 옮긴 김관진 당시 안보실장 측근의 작품이란다. “그 덕에 미국을 설득했어요. 대단하지 않나요.” 흡사 신곡을 발표한 가수의 들뜬 표정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전시작전권은 국방의 기본이다. 아무리 동맹이라지만 그걸 미국에 넘겨주면서 당당하다니.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시간을 번다 한들, 날로 고도화하는 북한의 핵ㆍ미사일 위협을 온전히 막아낼 재간이 있을까.
국방개혁을 주저하며 당장 감내할 고통을 훗날로 떠넘기는 사이, 미군은 감시자산으로 우리 대신 북한을 들여다보고 확장억제를 약속하며 든든한 방패막이가 돼줬다. 하지만 우리 군은 63만 병력을 짊어져 팔다리가 비대해지고, 육해공군은 서로 소 닭 보듯 하면서 심장 박동은 느려지고, 지휘부는 현상유지에 급급해 판단력이 흐려진 기형아 신세를 자초했다. 북한이 4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했지만 하루가 지나서야, 그것도 북한의 발표를 보고 나서야 군 정보당국의 평가를 공개하는 게 현실이다. 자신이 없다는 얘기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내 전작권 전환과 국방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내걸면서 칼을 빼든 것도 같은 심정 아니었을까. 송영무 국방부 장관 후보자는 선봉에서 악역을 맡을 ‘자객’으로 발탁된 셈이다. 육군이 장악한 우리 군에서 아웃사이더인 해군 출신이라 발목 잡힐 우려가 적고, 노무현정부 시절 국방개혁의 청사진을 그리는데 깊숙이 관여한 경험을 갖췄다. 또 문 대통령과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춘 탓에 속전속결로 새 판을 짜는데 안성맞춤 카드다.
물론 국방개혁의 적임자, 제1연평해전의 영웅이라는 후한 평가와 달리 송 후보자는 인사청문회를 거치면서 도덕성에 적잖은 상처를 입었다. 법무법인 고문으로 받은 월 3,000만원의 보수와 26년 전 음주운전 경력은 국민의 눈높이와 한참 동떨어져 있다. 전례 없이 기무사의 보고라인을 차단하며 기세 좋게 청문회를 준비하다가 언론의 집중포화에 무차별로 당하는 시행착오도 겪었다.
그렇다고 말을 갈아타야 할까. 박근혜정부 첫 해인 2013년을 되짚어보자. 북한의 3차 핵실험으로 위기가 최고조로 치달았지만, 안보라인을 육사 선후배 사이인 남재준 국정원장, 김장수 안보실장,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장악하면서 군 개혁은 고사하고 관심은 온통 이들 트로이카의 인맥과 입김에 쏠렸다. 눈치 빠른 일부 군인들은 줄서기에 바빴고, 급기야 청와대에 쓴 소리를 하다 파워게임에서 밀려난 장경욱 기무사령관은 6개월 만에 경질됐다. 청와대의 리더십마저 제 역할을 못해 알력에 시달리며 허송세월을 보내더니 이듬해 대단한 결단인양 전작권 전환 연기를 발표했다. 정부와 군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한 것이다.
문재인정부는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북한은 미국의 레드라인을 농락하며 쏜살같이 치고 나가는데, 우리 군은 저질 체력을 탓하며 지켜만 보고 있으니 한심할 따름이다. 송 후보자가 최선의 선택은 아닐지라도, 국방개혁의 확고한 비전과 소신 없이 군이 외풍에 휘둘리는 과오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의욕 충만해야 할 군인들이 한달 째 송 후보자의 거취를 주시하며 숨죽이고 바짝 엎드려 침만 삼키고 있는 실정이다. 속히 진용을 갖춰 리더십을 보여줘야 군심(軍心)을 결집할 수 있다. 이제 통수권자가 마무리할 때다.
김광수 정치부 기자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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