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권력 감시ㆍ고문… 이웃은 손가락질
빨갱이 낙인에 정신과 치료ㆍ죽을 생각도”
고향마을 주민들에 지난 과정 알리기로
34년 만에 웃으며 가족사진도 찍어
“‘억울하다’는 말도 못하고 공포에 질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립니다.”
34년 만에 간첩 누명을 벗은 고 최을호씨의 전북 김제시 진봉면 고사마을 묘소는 9일 색다른 제가 열렸다. 자식들은 무죄가 적힌 판결문을 올려드리고 떼를 손질했다. 기일(5월 27일)마다 눈치 보느라 다 모이지 못했건만 이날은 7남매 중 둘째 딸을 뺀 2남4녀가 고향집 뒷산 산소에 모였다. 활짝 웃는 모습으로 가족사진도 찍었다. 사형 집행 당일 “나는 간첩이 아니다”고 울부짖었다던 고인은 모처럼 기뻐하는 자식들을 바라봤을 것이다.
고인이 얽힌 김제 가족간첩단 사건은 7일 검찰이 항소를 포기하면서 법원의 무죄 재심 판결이 확정(본보 8일자 6면)됐다. 고인은 1954년 숙부 배를 탔다가 납북돼 20일간 억류된 뒤 풀려났고, 66년 7월 무장한 2명에게 납치돼 북한에 끌려갔다. 82년 6월 고인은 조카 최낙전ㆍ낙교씨와 함께 서울 용산구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에게 40일 넘게 고문을 당한 뒤 간첩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최씨는 사형 집행, 최씨에게 포섭당했다는 누명을 쓴 낙교씨와 낙전씨는 각각 구치소 사망, 9년 복역 후 자살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지만 살아남은 가족들이 그 긴 세월 견뎌낸 통한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버지 묘 떼를 어루만지던 맏딸 명자(69)씨는 “무지렁이 아버지가 영문도 모른 채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뒤 간첩으로 몰려 돌아가셨다”고 애통해 했다. 그는 평생 고향집에서 이웃의 따가운 시선과 공권력의 숨막히는 감시를 받아야 했다. 자신이 어딘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발설하면 죽인다는 협박을 받은 사건은 혹여 짐이 될까 봐 동생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화목했던 가족들 삶은 완전히 파괴됐고 경찰 감시와 동네사람들 의심의 눈초리 때문에 입이 있어도 말조차 못하고 죄인으로 살아왔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넷째 딸 명숙(58)씨는 “학창시절 이웃에게 손가락질 받고 친구들한테는 따돌림을 당했고 결혼해서도 감시는 계속됐다”라며 “빨갱이 가족으로 낙인 찍혀 살아온 삶은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이었고 죽을 생각도 많이 했다”고 털어놓았다. 이날 뒤늦게 부친 산소에 온 맏아들 낙효(63)씨는 교사였지만 이 학교 저 학교로 전전하다 그만 두고 수십 년째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이웃 주민과 터놓고 얘기할 수도 없었고, 친인척마저 발길을 끊어 가슴이 아팠다는 가족들은 이번 무죄 확정으로 34년 만에 세상과 마주할 용기를 얻었다. 최씨 가족들은 다음 주에 낙전ㆍ낙교씨 가족과 함께 고사마을을 찾아 이웃주민들에게 누명을 벗게 된 과정을 정식으로 알릴 참이다. 세상이 죄인 취급해도 남몰래 인정을 전한 이웃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조촐한 행사도 마련하기로 했다.
명숙씨는 긴 세월 맘에 담아뒀을 얘기를 길게 했다. “아버지처럼 국가보안법으로 옭아매 무고하게 피해를 당한 국민들의 억울한 누명이 하루빨리 벗어져 더 이상 피해자가 없길 바랍니다.”
김제=하태민 기자 ham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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