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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360˚] “자유의 몸으로 내 조국을 다시 보고 싶다”…작곡가 윤이상 인생 역정

입력
2017.07.08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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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 작곡가 윤이상. 한국일보 자료사진
재독 작곡가 윤이상. 한국일보 자료사진

“북괴는 남한의 지하세력을 재건하기 위해 동백림(東伯林ㆍ동베를린)에 거점을 설치하고 적극적인 대남공작을 벌여왔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년 전인 1967년7월8일, 박정희 정부 당시 중앙정보부는 ‘북괴대남적화공작단사건’의 진상조사 내역을 발표했다. 독일과 프랑스에 있는 유학생 및 교민 194명이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며 간첩으로 활동했다는 내용이었다. 총 관련자 203명, 사형 등 중형을 선고 받은 사람만 26명이었던 이 사건은 ‘동백림 사건’ 이라 불렸다. 부정선거 시비를 덮기 위해 정권이 만들어낸 최대 규모의 간첩 조작 사건이다.

수많은 지식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이 사건의 피해자 속에는 조국에서 추방당한 재독 천재 작곡가 윤이상도 포함됐다. 늘 자신의 조국을 작품에 담아냈던 그는 1995년 잠들 때까지 다시 고향을 밟지 못했다.

어부의 노래를 들으며 자란 통영 소년

윤이상은 1917년9월17일 경남 산청의 한 가난한 양반집 서자로 태어났다. 세 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통영으로 이사한 소년은 쪽빛 남해바다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고장에서 늘 음악을 느꼈다.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에서 그는 아버지와의 밤낚시를 했던 통영 앞바다를 이렇게 떠올렸다. “우리는 아무말 없이 잠자코 배 위에 앉아 물고기가 헤엄치는 소리나 다른 어부들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소위 말하는 ‘남도창’이라 불리는 침울한 노래인데, 수면이 그 울림을 멀리까지 전해주었습니다. 바다는 공명판 같았고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습니다.”

소년 윤이상에겐 모든 것이 음악이었다. 논두렁에서 우는 시끄러운 개구리 소리가 그에겐 혼성 합창으로 들렸다. 몇 시간 동안 이어졌던 유랑극단의 가무나 석가탄신일의 연등행렬, 무당의 씻김굿 가락도 지겹지 않았다. 통영에서 들었던 이 선율은 이후 그의 작품 속에서 재탄생했다.

조선 선조 때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던 통영 세병관은 윤이상의 어린시절 소학교 건물로 쓰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조선 선조 때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던 통영 세병관은 윤이상의 어린시절 소학교 건물로 쓰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에게 음악은 운명이었다. 8살 때 입학한 보통 소학교에서 서양식 악기인 풍금 소리를 처음 들은 그는 흥분했다고 했다. 단음뿐인 우리음악과 달리 화음으로 이뤄진 서양음악에 매료됐다. 음악 교육을 받은 지 얼마 안돼 그는 악보를 읽어냈고, 바이올린 곡까지 작곡했다. 그렇게 유년 시절을 보냈던 그는 17세 때 상업학교에 진학하란 아버지의 눈을 피해 몰래 서울로 향했다.

음악과 독립, 두 개의 열정

2년간의 서울 유학 후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에 입학한 그는 작곡과 첼로 등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그는 일제의 민족차별을 더 뼈저리게 느꼈다. 권리도 배움도 없이 고생만 하는 조선인 노동자들, 곳곳에 붙은 ‘조선인 사절’이라는 팻말은 그에게 조국의 현실을 실감케 했다.

유학 후 교사가 된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해 아이들에게 한글 노래를 가르치면서 수 차례 위기에 내몰리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항일운동을 위해 지하조직에 가담했던 그는 당시 일제 순사들에게 ‘조선가곡 작곡자’란 명분 아래 체포됐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그에게 고문과 체포, 저항은 일상생활처럼 반복됐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손에서 첼로를 놓지 않았다.

1957년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 '신음악 강좌'에 참가한 백남준(맨 왼쪽)과, 윤이상(두 번째)이 다른 참가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1957년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 '신음악 강좌'에 참가한 백남준(맨 왼쪽)과, 윤이상(두 번째)이 다른 참가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야 그는 음악에 전념할 수 있었다. 1956년 가족을 두고 홀로 유럽에 간 그는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 독일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작곡 공부를 이어갔다. 그리고 1958년 졸업과 동시에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과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등으로 유럽 현대음악계의 호평을 받았다.

1966년 독일의 도나우싱엔 현대음악제에서 발표한 대편성 관현악곡 ‘예악’은 그의 명성을 세계 무대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서양악기로 국악기를 모사한 ‘예악’은 “한국음악과 서양음악이 전통적이면서도 첨단적으로 결합했다”는 평을 받았다. 동백림 사건이 터지기 불과 1년 전, 그는 그렇게 전성기를 누렸다.

[윤이상이 1966년 발표한 관현악곡 ‘예악’]

“내 마음까지 감옥에 가두진 못한다”

“나는 북한 사람을 만난다는 게 정치적인 일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나에겐 북한 사람도 동포입니다.” 동백림 사건과 관련한 그의 회상은 진심이었다. 남과 북이 하나일 때 태어난 이 작곡가에게 분단은 오히려 이상한 현실이었고, 베를린에서 마주하는 북한 사람들을 피하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념을 넘어 민족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눈을 당시 정권이 이해할 리 없었다. 1967년6월 그는 중앙정보부에 납치돼 심문을 받았다. 정권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그는 1963년 북한에 갔다 왔다고 순순히 말했다. 그에겐 어릴 적 친구를 만나기 위한 여행이었지만, 정권은 여기에 간첩 혐의를 덧붙였다.

1967년 7월 서울 형사지법 대법정에서 열린 동백림 사건과 관련, 열렸던 첫 공판에서 윤이상(맨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과 그의 부인 이수자(첫 번째)씨가 기립해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67년 7월 서울 형사지법 대법정에서 열린 동백림 사건과 관련, 열렸던 첫 공판에서 윤이상(맨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과 그의 부인 이수자(첫 번째)씨가 기립해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함께 사건에 연루됐던 천상병 시인의 표현처럼,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고문을 당했다. 재판 끝에 그에겐 무기징역이 내려졌다. 간첩죄를 입증할 증거서류 하나 없이 자행된 판결이었다. 사건이 알려지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빌헬름 말러 등 국제적 명성의 예술인 161명이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이들은 서한에서 윤이상을 “한국문화와 예술을 한국 바깥으로 알리는 음악계의 귀중한 존재”라 칭했다.

그는 1970년 광복절특사로 풀려나기까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권은 그의 몸을 가두었지만, 그의 예술혼을 가두진 못했다.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과 기악곡인 ‘율’, ‘이마주’가 감옥에서 완성됐다. 중국 고전 ‘장자’속 ‘호접지몽’에서 모티브를 따온 ‘나비의 미망인’에는, 누명을 쓰고 구속된 자신의 현실이 하나의 꿈이길 바라는 그의 염원이 담겨있다.

[윤이상이 1968년 작곡한 혼성합창과 타악기를 위한 곡 ‘나비의 꿈’]

“자유의 몸으로 내 나라를 다시 보고 싶다”

석방과 동시에 추방당한 그는 다시 한국 땅은 밟지 못했다. 여러 차례 그의 귀국이 논의됐지만, 그 때마다 무의미했던 이념 논쟁으로 번번히 무산됐다.

하지만 그는 작품에 늘 조국을 담았다. 1972년 독일 뮌헨올림픽의 축전 오페라를 써 달라는 제의를 받은 윤이상이 작곡한 것은 ‘심청’, 지극히 한국적인 이야기였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소식을 접한 뒤에는 ‘광주는 영원히’란 곡을 작곡해 민주주의를 염원했다. 반쪽의 조국인 북한과도 끊임없이 음악적 교류를 했다. 1990년10월18일 분단 45년 만에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도 그의 작품이었다.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

윤이상은 베를린 자택의 앞마당에 한반도 모양 연못을 만들어 놓고 조국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말년에 일본을 방문하면서는 통영 앞바다를 먼발치에서라도 보기 위해 일부러 배를 타고 남해안 근처까지 왔다고 한다. 1995년 유럽 평론가들에 의해 ‘20세기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으로 꼽혔던 그는 “이제 내 고향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독일”이라는 한스러운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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