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배 접근 쉽지 않은 내륙항에
한국 군함의 이례적 정박
현지인들 “이런 배는 처음” 감탄
양국 우호 증진 ‘부수적 임무’
지난달 30일 베트남 호찌민 사이공항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아덴만의 ‘해적킬러’ 로 불리는 청해부대 23진 최영함(DDH-981). 지난 1월 초 소말리아 해역을 향해 블루피터(Blue Peterㆍ출항을 알리는 기)를 올린 지 6개월 만이다. 지난 2011년 1월 해적에 피랍된 삼호주얼리호 구조를 위해 ‘여명작전’을 전개했던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4,400톤)인 최영함은 연료와 식량 등 군수품 적재를 위해 이날 사이공항에 기항했다. ‘여명작전’ 당시 중령으로 작전참모였던 김경률 대령이 함장으로, 임무를 마치고 귀항 중인 최영함을 만나 아덴만의 최근 동향과 파병 부대원들의 애환을 들을 수 있었다.
육지 밟은 파병부대원들 “이제야 살 것 같다”
오전 10시 30분, 예정 시각에 맞춰 사이공항에 도착한 최영함에서 계류삭(선박을 계류시키기 위한 로프) 여섯 가닥이 뻗어 나왔다. 수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육중한 몸을 땅에 결박하고, 쥐가 배로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쥐마개까지 틀어막는 광경을 항구에서 지켜보던 짠 척 투언(25) 베트남 해군 중사는 “이런 배는 처음 본다”며 ‘great', ‘wonderful’ 을 연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이공항에 이 정도 크기의 군함이 입항한 것은 이례적인 일. 사이공항은 내륙항인 까닭에 큰 배의 접근이 쉽지 않다. 수많은 어선과 그물을 기뢰 피하듯 해야 해서 붕따우 앞바다에서 도선사가 탑승한 뒤에도 4,5시간 뒤에야 닿을 수 있다. 정연창 국방무관은 “보통 3,000톤급이 들어오는 곳”이라면서 “장기간 작전으로 지친 대원들이 피로를 풀고 사기를 돋우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고 말했다. 이전에는 주로 말라카 해협을 지나는 동안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를 기항지로 삼았지만 올해는 한국과 베트남수교 25주년 등 양국 관계를 고려해 이곳에 기항했다.
오전 11시 30분. 함상에서는 대원들의 외출을 앞두고 교육이 이뤄졌다. 오토바이 조심, 소매치기 주의, 음주 금지, 오후8시 복귀시간 준수 등 내용들이 확성기를 타고 부두까지 들려왔다. 일찌감치 여권번호 등 개인정보들은 육지로 전송된 터다. 부두에 임시로 차려진 베트남 입국심사대에서 간단한 수속을 받은 대원들은 삼삼오오 호찌민 시내로 흩어졌다. 2주에 한번씩 물과 기름이 실리는 동안 대원들에게는 외출이 허락된다. 아덴만 해역 작전 기간 동안의 외출은 주로 오만의 살랄라서 이뤄졌다. 군함은 국제법적으로 자국 영토로 인정되기 떄문에 대원들이 배에서 내린 뒤 베트남 입국수속을, 배에 오르기 전에 출국수속을 한다.
오랜만에 땅을 밟는 대원들의 표정은 간부와 사병을 불문하고 환하게 피었다. 점심 시간이라 많은 이들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식당.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방문한 뒤 유명해졌다는 한 쌀국수 전문점을 찾은 강주석(25) 하사는 돼지고기가 들어간 쌀국수가 없다는 점을 확인하더니 아쉬움을 표시했다. 작전 지역이 이슬람권이다 보니 돼지고기를 구경한 지가 언젠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갑판병 김태현(22) 상병은 “하루가 멀다 하고 갑판에 쌓이는 모래먼지를 치우고 양묘기(밧줄 감는 도르레)를 광이 나도록 닦느라 몸무게 10㎏이 빠졌다”며 “북적북적한 도심을 걸으니 이제야 살 것 같다”고 환하게 웃었다. 김 상병은 “한밤 갑판 위에서 별자리와 눈을 맞추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며 긴 항해와 작전으로 인한 긴장과 고독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김우영(25) 중위는 “출항 후 힘들어 하던 여자친구에게 아덴만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며 미리 써뒀던 편지를 우체국을 찾아 부쳤다.
오만 살랄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기 넘치는 도시 모습에 고무된 대원들은 이튿날에도 외출을 허락 받아 노트르담 성당, 중앙우체국, 통일궁, 벤탄시장 등 시내 주요 명소를 둘러봤다. 더러는 짧게 허락된 외출시간에도 불구, 시내에서 한 시간 반 가량 차량으로 이동해야 하는 꾸찌터널까지 ‘관광작전’을 펼친 팀도 있었다. 꾸찌터널은 베트남전 당시 남베트남해방전선이 미군을 상대로 항전하면서 만든 총 250㎞ 길이의 지하마을로 관광명소다. “옛 사이공(현 호찌민) 기항 며칠 전부터 잠을 설쳤다”는 한 대원은 커피와 초콜릿, 컵라면, 과자 등 간식거리를 싸들고 다시 배로 올랐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쳇바퀴 같은 일상에 사이공 기항은 대원들에게 ‘단비’같았다.
크게 확대된 정보망
“운이 좋아 최영함에 다시 올랐다”는 김경률 함장은 지난 2011년 여명작전 당시 작전참모. 그는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군함의 전투력은 당시보다 월등히 좋아졌다”고 자평했다. 파병 횟수가 쌓임에 따라 승조원들의 운영 노하우가 축적됐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승조원 300여명 중 김 함장을 포함, 청해부대 파병 경험이 두 번째인 대원이 70여명에 이른다. 10여명은 세 번 이상 파병 경험이 있다.
특히 23진으로 아덴만에 파견된 최영함은 작전 기간 중 유럽연합(EU) 주관으로 지난 2월 실시된 대(對)해적작전 ‘아탈란타’(Atalanta)에 참가했다. 한국 해군 사상 처음이다. 국위 선양은 물론, 미 해군이 주축인 기존 연합해군사령부뿐 아니라 EU와도 연합전선을 구축, 아덴만을 통과하는 선박의 보호 수준을 격상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함장은 “스페인 국적인 EU 사령관이 두 차례 훈련을 마친 뒤 헤어질 땐 울먹이기까지 했다”며 “해상뿐만 아니라 소말리아 내륙에도 정보망을 갖춘 EU와의 신뢰 구축이 향후 국적선의 항행 안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홍해-수에즈 운하-지중해로 연결되는 아덴만은 한국 해상 물량의 30%가량이 통과하는 해역이다. 연간 500척가량의 국적 선박이 통과하는 것으로 해군은 보고 있다.
다시 기승 부리는 해적
다행히도 작전 중 큰 사건은 없었지만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지난 5월말 발생한 서현호 사건이다. 서현호는 “해적선이 따라 온다”고 긴급타전 직후 연락이 끊겼다. 당시 살랄라에 군수 적재를 위해 정박 중이었던 최영함은 삭을 끊고 전속력으로 출동하면서 EU사령부로부터 해적의 예상 경로 안내와 함께, 수척의 군함 지원을 받았다. 김 함장은 “17시간 만에 서현호의 통신두절이 장비 문제 때문이라는 점이 확인되면서 작전은 마무리됐다”면서 “하지만 긴박하던 당시에 EU와 유대 강화는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해역이 넓어 각국 군함들은 이런 식으로 ‘품앗이’를 한다.
2011년 최영함 여명작전 이후 눈에 띄게 줄었던 피랍선박은 최근 증가 추세에 있다고 한다. 무탈한 항해가 상당 기간 이어지자, 다소 위험을 감수하고도 항해 거리를 단축시킬 수 있는 소말리아 연안으로 항해하는 배들이 증가했는데, 최근 기근이 겹치면서 해적행위에 가담하는 어민들도 덩달아 늘어났다. 실제로 올해 들어 인도와 아랍에미리트 선박이 납치되기도 했다.
김 함장은 “한국과 베트남은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인데, 군함이 들어왔다는 것은 양국 관계가 그만큼 긴밀해졌다는 뜻”이라며 “쉽게 갈 수 있는 기항지를 두고 굳이 사이공강을 거슬러 올라 온 것은 양국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한 해군 차원의 조치”라고 힘주어 말했다. 공식 목적이 군수적재라면 비공식적, 부수적 효과는 우호 관계 강화인 셈이다. ‘부수적 임무’까지 완수한 이들은 8일 진해항에 도착한다.
호찌민=글ㆍ사진 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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