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구 호프집 여주인 살해 후
현금ㆍ카드 꺼내 들고 종적 감춰
몽타주로만 남을 뻔한 사건
살인죄 시효 폐지로 수사 활력
쪽지문 정밀 분석해 범인 특정
‘키높이 구두’ 족적도 큰 역할
용의자 발뺌하다가 “범행 인정”
2002년 12월 14일 오전 1시30분. 키가 165㎝ 정도 됐을까, 자그만 체구의 40대 남성이 서울 구로구 한 호프집으로 들어왔다. 이미 다른 곳에서 한잔 걸쳤는지 입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했다. 안주도 없이 맥주 세 병을 주문해 마시기 시작한 남성은 가게 문을 닫는 시간(오전 2시)이 지나도록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게는 이미 텅 빈 상태. 가게 여주인 A(당시 50)씨는 우선 종업원을 퇴근시키고, 남성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이제 문을 닫아야 할 시간입니다.“
갑자기 남성 얼굴이 돌변, 살기가 돌았다. 가방에 넣어놨던 둔기를 꺼내고는 A씨 머리와 얼굴, 어깨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A씨 두개골이 완전히 함몰될 정도. 그 자리에서 숨진 A씨 시신을 가게 안쪽에 숨긴 남성은 유유히 지문 같은 범죄흔적을 깨끗이 닦아 나갔다. 마치 계획이라도 한 듯이.
뒷정리를 마친 남성은 가게 2층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맥주를 마시면서, A씨가 다락방으로 지갑을 가지고 들어가는 걸 봐둔 터였다. 현금 15만원과 신용카드를 지갑에서 꺼낸 남성은 곧바로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그는 다음날 70만원 상당 물건을 사면서 A씨 신용카드로 결제했다.
A씨 시신이 발견된 건 이날 오후 9시30분쯤. 출근한 종업원이 가게 열 준비를 하다 구석에 피투성이인 채 숨져 있는 A씨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서울 남부경찰서(현 금천경찰서) 형사들은 현장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깨진 맥주병 조각에 남아있던 작은 ‘쪽지문(조각지문)’과 다락방에서 발견된 ‘족적’ 외에는 범인을 특정할 만한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종업원과 남성이 신용카드로 물건을 산 상점 주인 등 목격자 진술을 바탕으로 몽타주를 작성해 수배하기도 했지만, 남성이 누군지는 쉽게 밝혀지지 않았다.
영원히 몽타주로만 남을 거 같던 범인 정체가 드러난 건 2017년 1월, 15년이나 지나서다. 공소시효(2017년 12월 14일)가 1년밖에 안 남은 시점이다. 서울경찰청 중요미제사건수사팀에서 사건 당시 현장에 남겨져 있던 쪽지문과 족적에 주목한 것이 엉킨 실타래가 풀리는 실마리였다. 범행 현장을 깨끗이 정리하면서 ‘완전범죄’를 꿈꿨지만, 깨진 맥주병 조각에 지문이 남았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공산이 컸다. ‘설마’하는 방심에 덜미가 조금씩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살인죄 공소시효를 폐지한 일명 ‘태완이법’(2015년 7월 시행)도 수사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쪽지문은 오른손 엄지손가락 3분의 1이 채 안 될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수사팀은 지문자동식별시스템(AFIS)을 활용, 지문에서 특이점 10여개를 찾아냈다. 이를 지문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한 결과, 범인을 장모(52)씨로 특정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발견한 족적도 범인 검거에 큰 역할을 했다. 뒤축 모양이 둥근 키높이 구두, 수사팀이 장씨 집을 압수수색 했을 때 장씨는 이와 일치하는 같은 종류 구두를 여전히 두 켤레나 가지고 있었다.
경찰은 장씨가 과거 신용카드로 물건을 산 상점 주인들을 다시 만나 인상착의를 재차 확인해, 지난달 26일 살인 혐의로 검거하는데 성공했다. 검거 당시 장씨는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것 아니냐”고 발뺌했지만, 경찰이 확보한 증거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결국 눈물을 흘리며 범행을 모두 인정했다.
장씨는 경찰에서 “가게 밖에 있던 쇠파이프를 갖고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진술했다. 반면 경찰은 피해자 상처 흔적을 분석한 결과, 장씨 진술과 달리 망치 같은 다른 둔기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금품을 훔칠 목적으로 둔기를 가방에 미리 준비해가는 등 계획적인 범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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